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연구하면 그가 어떻게 구속함을 받았는지 알게 되고,
더 나아가서 구약 백성들이 각각 어떻게 구속함을 받았는지 역시 동일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아브라함과 구약의 선진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연구는 정말 가치가 있으며, 우리 신앙의 굳건한 믿음을 제공해주는 소중한 작업입니다.
1. 천지창조의 목적
천지창조의 목적은 크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이며, 그 영광의 중심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함입니다.
창조의 핵심으로 자리잡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됨이라는 목적 아래서 피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특별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형상
형상을 입었다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이 무슨 형상이 있느냐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보이지 않는다고 형상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겔1:2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이 서로 다를까요?
서로 다르면 전혀 다른 존재일 것입니다.
동물과 사람의 형상이 다르듯이 서로 다르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성립이 안됩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는데 지금은 <흙에 속한 자의 형상 안에> 이것이 존재합니다.
대단한 영광입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현재적 모습의 특징입니다.
천지창조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됨이라는 목적을 이루는 시작입니다.
비록 흙에 속한 자의 형상가운데 성령이 내주함이지만 그 영광도 매우 큽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완성된 모습으로,
창조의 목적을 이룬것입니다.
*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
3. 하나님의 자녀되는 과정
흙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됨이라는 목적에
도달할 수 가 없었습니다.
*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히 9:15)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구속이라는 계획을 실행하셨습니다.
죄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됨이 좌절된 인간을 향해, 값을 지불하고 사는 일 즉 구속(대속, 속량)을
베푸셨습니다.
어떻게 인간을 구속하였습니까?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4)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기에 구속을 이루었습니까?
먼저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류가 범한 죄의 저주를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3:13)
저주를 짊어지신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피흘림을 통해서 저주의 값을 지불했습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엡1:7)
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데 언제부터 우리 인류는 이런 구속에 참여하게 되었을까요?
창세기에는 구속이란 단어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속은 먼 훗날 이야기일까요?
*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사29:22)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구속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즉 야곱족속이 모두 구속함에 참여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
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4. 창세기에서 구속을 언급하는 단어 찿기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구속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기에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구속을 통해 예수님이 죄인의 죄를 감당하는 것이 예식이 무엇일까요?
죄의 짐을 지고 죽어가는 동물의 제물됨을 보아야 합니다.
레위기를 통해 번제단에 드려지는 동물의 몸과 피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 제물과 피는 장차 단 번에 드려질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히9:13-14).
창세기에는 구속이란 단어 대신에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드리는 모습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이런 예식들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아담과 가인, 아벨의 시대부터 제단을 세우고 번제물을 드리는 예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범죄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하심이 시작된 것입니다.
구속의 역사는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장차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구속의 역사와 효과는 이미 발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을 드린다거나(창4:3-4),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다라는 말은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창8:20, 12:7-8, 13:4,18, 22:9, 26:25, 33:20, 35:1,37)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라는 말 역시 제사를 드린다는 다른 표현입니다(창26:25, 4:26).
하나님이 믿음의 선진들을 택하고 사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먼저는 보배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었고, 비록 그들이 타락했을지라도 장차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속하였기에 그들을 사랑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속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신앙생활을 한 것 입니다.
구속함을 받았던 믿음의 선진들이기에 그들은 당연히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기에 이들에게 임한 성령은 그 이름이 <아버지의 성령> 이었습니다.
구속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에 이들은 정말로 새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들
이었습니다.
*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사43:14)
이스라엘을 구속했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자가 된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
하였기에 <거룩한 자>라는 칭호를 받은 것입니다.
5. 동물 제사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
레위기를 제일 지루한 책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서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사랑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서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보면 너무도 소중한 책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죄인된 인간이 자신의 죄를 동물에게 전가시키는 행위는 단순히 동물이 죄를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동물이 죄를 감당한다면 인간은 가장 나쁜 존재가 되고, 동물들의 죽음은 가장 비참한 것이 되고 맙니다.
레위기에 나타난 이런 의식들을 통해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사람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죄를
지시고, 친히 죽으실 것을 보여주는 예식입니다.
동물들이 죄의 전가를 받고 죽게 될 때, 이들이 부르짖는 소리와 그 흘리는 피와 쪼개어지는 몸을 보며,
인간은 구속함에 대해 감사하고, 하나님은 장차 그 아들을 통해 구속하시는 약속을 이행하십니다.
6. 구속함의 연속성
구약성경은 구약 백성들에게 구속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선포합니다.
*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15:13)
*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사1:27)
*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111:9)
*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시 130:8)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제사를 통한 구속예식을 통해 무엇을 교훈 받았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구약 백성들이 제사는 드렸지만 구속에 대해 무지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다는 주장까지 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제사 속에 담긴 구속의 지혜와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구속의 제사를 드리면서 장차 오셔서 그 백성들을 속량할 자를 기다렸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맞이했던 안나 선지자의 말입니다.
*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2:38)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도 역시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24:21)
7. 구속과 성령
구속함이 있으면 반드시 그 결과 주어지는 성령이 내주해야 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사실 성경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남게 됩니다.
구속함은 받았는데 성령의 내주는 모르거나, 성령의 내주는 있는데 구속함을 믿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바로 모순임을 드러냅니다.
구약백성들 역시 구속의 은혜를 입고 성령이 내주하였기에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동행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죄인과 결코 대화하거나 동행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하며, 화목한 교제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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