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구원론

선악과를 통해 본 구원

오은환 2015. 4. 28. 01:05

구원이란 귀한 선물은 언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일까요?

구원론에 혼란함을 드러내는 시기이기에 다시금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세대주의처럼 여러 시대를 구분해서 그 시대에 맞게 살펴보아야 할까요?

타락 전과 타락 후로 나누어서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타락하기 전부터 구원의 길 즉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길이 필요했을까요?

 

1. 타락 전 아담의 상태

창조된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요?

매일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 오셨습니다.  

익숙한 상황이었기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동산에 거니시는 소리를 통해 그 분이 오심을 알았습니다(창3:8).

 

아담은 어떤 상태이기에 스스럼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아담은 자유롭게 동산 열매들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를 통해서 그가 죽음을 당하지 않고 영생하는 존재가 됨을 알고 있었습니다(창2:9, 3:22).

 

아담은 죽지 않았지만 이미 죽음이 무엇이고, 영생이 또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아담은 성령이 내주하였기에 예수님처럼 신성의 충만한 지식이 있었습니다(골2:9). 

생명나무를 통해 영생에 이르는 것이 곧 자신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임을 알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은 곧 자신 속에 있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임도 알았습니다. 

아담은 이미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의 이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창2:19).

 

2.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통해 본 인류의 구원

만일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부질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인류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영생에 이를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생명나무는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나무로 지정하였기에 그 효력을 발생했습니다.

성령에 충만했던 아담은 이런 지식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면 선악과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목적(구원)을 이루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선악과는 생명나무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인류로 하여금 성령의 조명 아래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하려는 것을

나타내는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 이르기까지 성령 안에서 보증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즉 선악과는 생명나무의 은총에 참여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을 드러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기서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진노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런 그들을 <하나님께 반역>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호6:7)

 

하나님의 이런 계획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창세 전에 이미 세워졌다고 선언합니다.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3. 행위 언약인가?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아담과 맺은 언약을 행위 언약이라 명명합니다.

신약 시대의 은혜 언약과는 뭔가가 다르다는 어감을 사용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을 때 상황을 보면 신약과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근거로 성령을 주심과 같은 상황입니다.

아담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영생을 취할 존재가 되었고,

성령의 내주와 조명하심을 따라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 순종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결국 구속과 성령의 내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됨의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타락전 인류나 타락 후의 구약 백성들이나 신약 성도들이나 모두 구원의 길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함을 받고 성령이 내주하심을 따라 순종함으로 구원의 길 즉 하나님의 자녀됨에 도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류에게 행위 언약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행위 언약이라 하는 것이 실상은 구속과 성령의 내주함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은혜언약이라 불러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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