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난해구절

날마다 죽노라

오은환 2016. 4. 14. 16:43

신앙인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활기를 지닌 자입니까, 아니면 날마다 자책하며 회개하는 삶을 중심으로 삼아야 할까요?

둘 다 반복적인 형태가 나타날까요?


많은 사람들이 겸손함을 근거로 자책하며 회개하는 삶을 좋은 신앙으로 삼으려 합니다.

특히 죄에 대한 회개나 탄식으로 바울의 말을 인용하곤 합니다.

 * ...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일전에 어느 지인과 로마서 7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신앙인의 고백인지,

아니면 율법 아래에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인지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한 탄성 때문에 그런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율법 아래서 신음하다가 예수님을 만났던 바울의 회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 아래 신음해야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말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라는 말씀을 펼쳤습니다.

 " 봐라, 바울이 죄 아래서 날마다 죽지 않느냐"


과연 이 말씀은 죄 아래에 신음하는 바울의 모습 즉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모습일까요?

"죽노라" 라는 동사는 이렇습니다. 

원어 '아포드네스코'(죽노라)는, 동사/ 직설법/현재/'능동태' 형태로 쓰였습니다.  


바울 스스로 죽는 것이지 결코 외부의 세력(죄, 핍박, 죄의 산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날마다 죽는다는 말을 했을까요?

왜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요?


먼저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을 다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장래의 삶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내일이 없기에 오늘 한 날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허무한 삶을 살게 됩니다(고전15:31).


그러나 상급이 있고 영광스런 부활을 믿었던 바울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죽노라'라는 현재적 삶의 역동성은 앞의 문장과 연결됩니다. 

 * (부활이 없다면)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고전15:30)


누구나 복음을 전하는 삶은 <언제나 - 날마다> <위험 - 죽음> 앞에 노출됩니다. 

노출 당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스스로 노출합니다.


바울의 날마다 죽노라는 말씀은 복음 때문에 언제나 위험에 노출하는 삶을 묘사한 것입니다. 

부활을 믿기에 죽음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믿으며 역동적인 삶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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