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눅18:1-8)는 기도에 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끈질긴 기도는 응답된다?>는 다소 빗나간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기도하면 이루어준다는 대표적인 본문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1. 종말론적 상황으로 보자
하지만 이 비유는 <종말론적 상황>을 염두해두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변입니다(눅17:20).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임하는 때'를 재림의 날로 확실하게 알려줍니다.
*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눅17:22)
가시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눅17:25), 그 후 재림 때에 나타납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때처럼, 인자가 나타나는 날 심판이 일어납니다.
*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17:30)
2. 깨어 기도함으로 <가시적인 하나님 나라(재림)>를 기다려라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비유는 평범한 기도생활의 교훈을 주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마지막 날, 즉 주의 재림이 있기 전 성도들이 기도해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절대로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던 불의한 재판관이, 번거로워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교훈을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가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매우 중요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늘 아버지는 자녀들의 아픔(원한, 신원)을 <속히> 들어주십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18:8)
언제 이렇게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주의 재림 때 그렇게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3. 믿음을 볼까, 안볼까?
매우 어려운 말씀이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즉 주의 재림의 순간이 다가오면서,
우리 성도들의 믿음을 보겠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안보겠단 의미입니까?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눅18:8)
'그러나'로 사용된 원어 '플렌'은 비교급입니다.
그러나/그 외에/그렇지만/게다가/그럼에도/오히려... 이런 뜻을 가집니다.
플렌(그러나, 그럼에도)이 어느 단어와 비교해서 쓰인 것일까요?
<속히>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성도들의 부르짖음을 기억하고 속히 오지만,
그렇다고 성도들의 믿음을 전혀 보지도 않고, 곧바로 오지는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계시록의 두 단어, <속히>와 <반드시>를 이해했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습니다.
이 사실은 성도라면 누구나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오시는가에 대해 서로의 느낌이 다를 수 있습니다.
<속히>라는 말씀은 성도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늦지 않게(모두 죽음 앞에 놓여 있기에),
그리고 가장 적합한 시간에 오심을 의미합니다.
4. 어느 정도의 믿음을 요구할까?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의 믿음을 얼마나 보실까요?
대 환난의 핍박이 너무 심하기에 그 날들을 감해주십니다.
*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그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24:22)
믿음을 보시지만 한편으로는 대 환난 모든 날들을 지내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믿음이 충분한가를 긴 시간 평가하지 않음),
감해주시면서 믿음을 보십니다.
속히 오시지만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을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21:19)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이 구절로만 보아도 우리는 주의 재림이 대 환난이 지난 후 있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택하신(성도들) 자들을 위하여 날들을 감해주시며(마24:22),
인자가 올 때에 성도들의 믿음을 보시는 것을 보면서,
"아, 재림이 대 환난 후에 있구나"
하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