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논쟁을 보면서 우리 역시 동일한 문제를 다뤄보았으면 합니다.
간단하게 <중생은 언제 시작되는가?> 입니다.
1. 중생(거듭남)의 정의
조직신학자 루이스 벌콥은 중생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면서 마침내 정의를 내립니다.
"중생이란 말은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 속에 심어주고, 영혼의 주도적 성향을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라 정의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개론, 성광문화사, 루이스 벌콥 저, 신복윤 역, p.248)
중생은 쉽게 이해되는듯 하지만 실상 매우 어려운 주제입니다.
어렵다는 것은 아직까지 온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중생은 쉬운 말로, 거듭남,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구속과 성령없이 존재하던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내주로
새롭게 되어,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중생을 경험했습니다. 만일 중생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성도가 아닙니다.
2. 중생의 구약적 의미
중생은 구약이나 신약 모두 의미가 같습니다만 쉽게 설명하기 위해 세분했습니다.
어떤 자들은 구약에 성령의 내주하는 역사가 없는데 중생이 있을 수 있는가 반문합니다.
성령이 없었다면 구약백성들은 거듭나지 못할 것입니다만 성경은 그들도 성령이 내주했다고 알려줍니다.
1) 아브라함
왜 아브라함을 먼저 사용하여 중생을 설명해야 하나요?
물론 그 이전 믿음의 선진들도 아브라함과 동일한 형태로 중생했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만
아브라함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제 중생했을까요?
바울은 할례를 예로 들어 아브라함이 새롭게 됨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음으로 중생하지 않았습니다.
*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김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4:11)
아브라함이나 그 선조들이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주신 것을 믿으며,
<성령의 내주함>으로 인함입니다. 할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외적으로 확인시켜준 표입니다.
2) 아브라함의 후손들
아브라함에게 할례 언약(창17장)을 세우신 이후에 그 후손들에게 난지 팔 일 만에 할례의식을 행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할례를 행함으로서 유아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동일한 복을 주셨습니다.
유아가 아무런 의식이나 신앙고백이 없더라도 그들을 아브라함처럼 의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믿는 부모를 지닌 유아들의 중생입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보면 아브라함 이전에는 비록 할례 의식은 없었지만 동일한 복을 주셨으리라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할례 의식이란 과정을 겪게 하셨을까요?
외적 의식을 통해 구약 백성들의 신앙을 더 견고하게 하며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마치 신약의 세례나 성찬과 동일한 은혜의 수단입니다.
할례를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중생에 참여합니다.
유아의 상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부모와 한 몸으로서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유아들이 원죄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할례는 난 지 팔 일만에 행합니다.
태어나서 칠 일간은 부정합니다(레12:2).
부정함이 끝나는 팔 일 되는 날에 할례를 행합니다.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지나면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레12:6).
3) 이방인들의 구원
구약시대 이방인들 가운데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구원에 참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이나 주변국의 나그네로서 하나님을 알고 믿음을 가졌을 때
<반드시> 할례를 행함으로 의식들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유월절 어린양) 먹을 것이며(출12:43)
*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니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출12:48)
3. 중생의 신약적 의미
신약적인 특별한 의미를 찾는다면 구약시대가 모형을 통해 신앙고백을 했던 것에 비하여,
신약시대는 더욱 선명한 실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 분을 통해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1) 유대인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 모형을 통해 보았던 메시아를 이제는 실체되신 예수님을 통해 더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에게 중생은 모형과 실체 두 가지 모두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이나 신약 모두 동일합니다.
2) 이방인 신자들
이 부분을 가지고 모든 모델로 삼으려 하면 매우 좁은 생각에 갇히게 됩니다.
사도들이 쓴 서신서에는 중생에 관하여 이방인의 관점에서 언급을 합니다.
이방인 불신자들이 복음을 듣고 중생을 경험합니다.
그런 경우에 일정한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를 복음을 들음에서(외적 부르심) 성령의 역사(내적 부르심)하심이라는 순서를 통해
불신자에게 중생이 일어나게 합니다.
*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그러한 과정의 역사를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분명하게 느낍니다(요3:8).
회심을 큰 반응을 통해 그 순간을 기억할수도 있습니다.
3) 믿음의 자녀들(유아들)
아브라함의 후손처럼 이제 신약 이방성도들도 그 자녀들을 낳으면 어찌될까요?
난 지 팔 일만에 할례 대신 유아세례를 베풀어야 할까요?
할례처럼 팔 일을 지내야 할까요?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할례는 태어난지 칠 일동안 부정한 상태임을 선포합니다.
왜 칠 일을 주었는지 모르지만(여성의 월경처럼),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태어날 때나,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될 때 아무도 의인의 상태로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굳이 날짜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믿는 아이라도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믿는 부모의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구약처럼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선언만 하고 나중에 커서 잘 믿어라 하는 형태가 아닙니다.
유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그 은혜에 참여하게 모든 것들을 행하셨습니다.
즉 구속의 은혜를 주셨고 성령이 내주함으로 중생을 일으켰고 믿음의 출발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유아나 아이들에게 그들의 천사들이 수고한다고 알려줍니다.
*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느니라(마18;10)
어린 아이들에게 천사가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역할을 합니다.
*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1:14)
어린 아이들은 단지 선언적으로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고 그 결과 성령이 내주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신구약 모두 아이들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21:16, 시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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