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읽다가 참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성령충만했고, 또 특정한 장소에서 보호와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심지어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영안이 열린 세례 요한이지만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행하는 일을 보니 답답하고 메시아와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았습니다.
성령충만한데도 왜 그렇게 이해가 안 된것일까요?
열두 제자들 역시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병든자를 고치며,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했는데도
메시아의 사역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메시아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령충만이 사람의 삶과 지식을 얼마나 바꾸는지, 아니면 그 틀 안에서 끌고 가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그 분의 의지 안에서 역사하거나, 또 보내신 자 즉 성부나 성자의 계시의 틀 안에서
비추기도 합니다.
성령충만함을 잘못 이해하면 모든 것을 다 알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거나 그렇게 신봉하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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