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 어느 것이 예수님이 알려준 계명인지 뚜렷하게 모를 때가 많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당연한 의무이자 특권인데 이것이 흐릿하면서
신앙의 방향이 갈팔질팡 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의 계명을 지켜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계명도 지켜야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고 알려줍니다.
1. 예수의 계명
* 우리가 그(예수)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2:3)
*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요일4:21)
예수님이 주신 계명을 새 계명으로 이해합니다.
더불어 옛 계명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알려줍니다.
(옛 계명 = 하나님의 말씀)
*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요일2:7)
2. 하나님의 계명
* 그(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3:23)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5:2)
하나님의 계명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것을 성경은 다양한 용어로 표현합니다.
율법 찬가로 불리는 시편 119편을 통해 다양한 이름을 보여주지만 모두 하나로 동일합니다.
(주<하나님>의 계명 = 주의 말씀)
① 여호와의 율법 - 8 회
② 여호와의 증거 - 20 회
③ 주의 법도 - 21 회
④ 주의 율례 - 21 회
⑤ 주의 의로운 판단 - 6 회
⑥ 주의 말씀 - 42 회
⑦ 주의 계명 - 22 회
⑧ 주의 법 - 15 회
⑨ 주의 길 - 2 회
⑩ 진리의 말씀 - 1 회
⑪ 주의 교훈 - 4 회
많은 신학자들이 구약의 율법(하나님의 계명)은 예수님의 계명에 비해 무겁다고 생각합니다.
칼빈같은 신학자도 이 부분에 있어서 헷갈려 합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이 구절이 옛 계명과 새 계명을 비교한 것일까요?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이 결코 무겁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많은 신학자들이 옛 계명이 무거운 이유로 <성령이 부재>로 봅니다.
성령이 없는 상태로 율법을 지키려하니 하나님의 계명이 무거운 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성경을 보는 큰 틀이 잘못된 것으로 결국 그런 프레임으로 구약을 해석하여
구약 성도들을 불행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3. 하나님의 계명(옛 계명) = 예수의 계명(새 계명)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할까요?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하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어떤 자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교회는 예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정 종파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교회는 환난 전에 휴거되고 이스라엘만 남았다는 엉뚱한 주장을 합니다.
*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있더라(계12:17)
하나님의 계명이나 예수의 계명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은 모두 동일합니다.
4. 옛 계명 아래 있지 아니하며 새 계명 아래 거하는 그리스도인
바울은 자신을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한 자>로 규정합니다.
여기서 율법은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그림자로서 역할 아래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왔으니 더 이상 모형이 제시한 그늘 아래 있지 않음입니다.
*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20)
반대로 이방인들을 향해서는 자신이 율법폐기론자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로 묘사합니다.
*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21)
바울의 율법 이해는 간단합니다.
구약의 모형으로 존재했던 율법을 그리스도가 완성하였기에 그리스도가 이루신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이제는 문자적 율법 조항들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마음에 새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은 감동이 없던 문자적인 율법에 불과했을가요?
구약 율법도 감동적이며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 마음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가리키던 그리스도가 오셔서 직접 하나님과 이웃을 말이 아닌 가슴으로 전해주신 것으로
율법의 마침(텔로스)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본 사랑과 율법이 요구한 사랑은 동일합니다.
두 가지 계명이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서 동일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은 율법의 여러 조항들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해 존재했던 모형들(성전, 제사, 절기, 안식일, 율법)은 그리스도에게서 그 사명을
다했습니다. 율법의 의식법 역시 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 그 역할이 끝났습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여러 계명들은 그리스도의 율법 속에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율법(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펼치면 문자적인 계명들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십계명이나 여러 계명들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구약의 여러 율법들의 조항들을 지키려 하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에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고백하는 조항들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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