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막대한 재정의 근원을 십일조로 보고 과연 십일조가 성경적인지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대형교회의 영향력의 한 축으로 십일조는 좋은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세습이나 부패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십일조의 기원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십일조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어떻게 완성되었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십일조의 의미를 어떻게 계승해야 할까요?
★ 아브라함과 십일조
* 그(멜기세덱)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19-20)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만남에서 갑자기 십일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동맹군들이 가나안의 여러 왕들을 쳐부수고 그 전리품을 가지고 왔을 때 제사장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의 승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라 알려줍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제사상 멜기세덱에게 드립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의 십일조나 율법의 십일조를 이방 나라들의 전통에서 가져온 것으로
봅니다.
"십일조 제도는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기원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 근동에서 왕궁을 위한 일종의 세금제도로 매우 광범위하게 실시되고 있었기에 이스라엘도
단지 그것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이 제도는 약속된 땅에서의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로서
그들의 삶을 다스리기 위한 제도로 변천 승화되었다"
(신학지남, 제56권 4집(통권 222호), 1989년 겨울호, 오경의 십일조 법의 주해, 김인환, p.209-210)
개혁주의 신학은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율법의 것과 비교하여 자발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율법이 지시한 십일조는 의무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주장입니다.
"Y. Kaufmann의 견해에 따라 Weinfeld가 제의한 바대로,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하나님에 대한
자발적인 선물임을 보여주고 있다"(p.189)
"초기에는 자발적이었으나 점차적으로 명령적인 의무로 변천하였다"(p.210)
십일조는 단순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개념을 넘어 제의적인 성격을 지녔습니다.
창세기에는 자세한 언급이 없기에 모든 것이 추론으로 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명령하지 않는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제사는 하나님이 지시한 방법으로만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드려지는 제사가 모두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추론을 통해 보면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는 자발적으로 드려진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드렸다고 보는 것이 더 성경적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낭만적으로 떠돌아 다니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한 삶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받는 것 -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상속자가 되는 복 - 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창26:5)
우리는 아브라함이 지켰던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것은
모릅니다. 그 속에 십일조라는 계명이 들어있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아브라함이 주저없이 드린
것을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것(십일조)은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레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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