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계시록 도서

(1)이한수 교수 요한계시록

오은환 2018. 11. 14. 22:48

총신대학원에서 오랫동안 가르쳤던 이한수 교수가 요한계시록을 출간했습니다. 

바울신학의 권위자로서 많은 논문들을 쓰면서 바울의 종말론과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계시록과 연결시키신 것 같습니다.

저술한 순서를 따라 이한수 교수의 계시록을 살펴보고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 책을 통해 이한수 교수는 자신의 신학의 큰 틀을 소개합니다.

책을 쓰기 이전까지는 무천년의 견해를 가졌지만 이광복 목사와의 만남을 통해 

역사적 전천년설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이광복 목사의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간략하게 이광복 목사의 해석법과는 많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계시록 전체를 보는 것의 차이점도 있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서

큰 차이가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목회자들이 수고하여 계시록을 저술했을 때 정작 계시록 안에서 어떤 문제를 발견하기 전에

그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서 기초가 든든하지 못함을 드러냅니다)

 

무천년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두 가지 큰 전제들이 저자를 따라다닙니다.

묵시문학과 요한신학입니다.

저자 이한수 교수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다룰까요?

 

"계시록의 서문을 읽어보면 요한이 그것을 작성할 때 묵시, 예언, 서신이라는 세 장르를 활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p.16)

 

"그렇다면 계시록의 장르 성격을 올바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묵시적 틀을 갖추고 있고,

편지 형태로 기록된 예언서'라고 할 수 있다"(p.18)

 

저자는 상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Beale의 글을 통해 두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근접문맥과 원접문맥의 적절한 사용과 이런 상징언어가 구약과 유대교 문헌에서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참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상징적 의미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계시록의 근접 문맥과 원접 문맥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징 언어가 구약과 유대교 문헌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p.20)

 

해석학적 정확성을 갖추기 위해 근접 문맥과 원접 문맥을 잘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묵시적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 구약의 묵시 장르(다니엘, 스가랴 등)를 살펴보는 것 역시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유대교 문헌에서 묵시문헌을 살펴보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조지 래드의 말처럼 유대교 묵시문헌과 계시록은 별 연관성이 없기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요한신학이 계시록에 미친 영향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한수 교수는 이 책의 곳곳에서 요한신학을 자연스럽게 강조합니다.

환상과 설명을 통해 계시를 받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요한이 자신의 신학을 근거로 많이 다듬었다고

봅니다.

 

"계시록과 같은 묵시문헌을 해석할 때 저자 요한의 의도를 오류 없이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p.21)

 

"묵시문헌의 상징들은 워낙 신축적인 해석이 가능한 긴장상징 또는 활력상징들이기 때문에 저자의 본래 의도를 

완벽하게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p.22)

 

"요한계시록에는 시각적 환상과 청각적 메시지를 병치하거나 대조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상징적 의미 세계를

추구하는 여러 실례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요한이 채용한 독특한 문예적 기법을 관찰하는 것은 중요하다"(p.26)

 

"김추성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심판재앙)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한'

요한 자신의 수사적 장치일 가능성이 있다.

...요한은 인 재앙 심판을 나팔 재앙의 상징적 언어로 다시 반복해서 묘사하되 좀 다른 각도에서 좀 더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사건을 전개한다"(p.34)

 

이한수 교수는 여느 신학자들처럼 요한신학이 계시록의 흐름을 좌우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또 다르게 표현하면 요한이 계시를 본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을 원형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요한이 이해한 신학적 관점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했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계시록을 미궁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아무도 요한의 신학을 제대로 볼 수 없고 또 본다고 해도 증명할 수 없기에 불가지론으로 끌고 갑니다.

요한계시록 자체의 내증을 통해 볼 때 계시록은 요한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이리저리 짜깁기 한 책이 아닙니다. 

 

그가 보고(54회), 듣고(42회), 보고 들은 것(5회)을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라는 것을 내증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이러한 틀이 과거 신학자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함이 좀 식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