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선지자는 사도 요한처럼 하늘이 열리며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형상(첼렘), 모양(데무트), 모습(마르아)이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단어에도 데무트가 사용됩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모양을 논하는 것에는 두려움이 존재한가 봅니다.
침묵함으로 논하지 않으려 합니다.
오늘날까지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모양을 모르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초점 잃은 예배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마르아)이 내게 보이니(겔1:1)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은 단 한줄로 묘사하며 그칩니다.
* ...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겔1:4)
에스겔은 보좌 위에 계신 하나님의 모양의 설명을 뒤로 한 채 그 밑에 있는 네 생물을 집중 조명합니다.
에스겔 1장 5절부터 25절까지 네 생물을 묘사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당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잠깐 언급했던(사6장) 네 생물의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납니다.
에스겔은 왜 네 생물을 집중 조명한 것일까요?
네 생물의 형상과 모양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모습을 가진 분인지 설명하려 합니다.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이 모습은 하나님의 보좌를 감싸고 있습니다.
네 생물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모습(형상)으로 옮겨갑니다.
네 생물이나 하나님이나 모습은 모두 사람의 형상과 같게 묘사합니다.
*...그들(네 생물)에게 사람의 형상(데무트)이 있더라(겔1:5)
*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데무트)이 있어 <사람의 모양 - 마르에> 같더라(겔1:26)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논하면서도 그 자체는 건드리지 않고
의미만 찾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으로만 생각합니다.
인간 안에 있는 성품으로만 한정하다보니 뜬 구름 잡듯이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했는가는 잘 알지만 본질적인 것 즉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습니다. 희미한 형상조차 이해가 안된 상태로 하나님을 예배드리려고 하니 경외함이 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