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잠깐 언급 했듯이 두 증인 문제는 재림의 때가 되었다는 관점에서 삽입되었습니다.
9장의 여섯째 나팔 재앙(둘째 화)이후 곧바로 일곱째 나팔 재앙(셋째화, 마지막 나팔 재앙,
큰 나팔)이 왔더라면 쉽게 이해될 수 있었는데, 중간에 삽입된 부분이 있어서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계시록 전개를 통해 독자들에게 주의 재림이 촉박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두 증인이 삽입
되었습니다. 종말에 나타날 큰 특징들은 이렇습니다.
1) 천국복음의 온 세상 전파
2) 이스라엘의 회복(롬9-11장)
3) 적그리스도의 출현(살후 2장) - 배도하는 일이 일어남
4) 순교자들의 수가 참(계6장)
천국복음의 온 세상 전파는 마지막 때까지 전해져야 할 복음과 더불어, 모든 사람들이 변명하기
어렵게 하나님의 복음이 실제적으로 전파됨(여러 재앙들)으로 나타납니다.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더불어 나타나는 여러가지 현상들이 없이는 주의 날이 이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살후2장)
순교자들의 숫자의 증가는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통치 기간에 넘쳐날 것입니다(계12-14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두 증인의 활동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이 부분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두 증인의 활동구절을 어디서 찾는가가 시작이면서 중요합니다.
최갑종 교수님 같은 분은 11장 3절에서 시작합니다. 1-2절은 배제합니다.
(두 증인은 누구인가? - 학술지에 실린 글입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찾을 수 있고,
지금까지 두 증인에 대한 유명인들의 생각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매우 유익한 자료가 됩니다)
저는 11:1절부터 시작한다고 봅니다.
1. 두 증인은 누구입니까?
오늘날까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 본문입니다.
두 증인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찾아 봅니다.
1)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4)
2) 두 촛대(4)
3) 두 선지자(10)
1,2 번은 스가랴 4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천년이나 역사적 전천년의
대다수가 두 촛대란 말을 인용해서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즉 모든 성도들이란 말입니다.
이광복, 민병석 목사님은 대표적으로 두 증인은 종말에 일할 사명자들로 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두 증인이 곧 남자가 낳은 아이라 하고 십사만 사천과 동일한 사람들로 봅니다.
이단들은 자신들의 집단이 14만 4천의 자격을 갖춘 집단이라 말합니다.
사명자나 자신들의 집단이란 주장은 논할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이미 7장, 십사만 사천은 누구인가에서 다루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가장 많이 주장하는 무천년과 역사적 전천년주의의 "교회(온성도)"라는 주장이 맞는지를
확인했으면 합니다.
두 증인이 교회라면, 전삼년반이 끝나면 교회(모든 성도들)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상징으로
가버림), 휴거가 일어나야 하기에 참 난감합니다.
그래서 고육책으로 모두 상징으로 해석해서 이리저리 혼동에 빠지고 맙니다.
"두 촛대"는 스가랴 4장에서는 두 사람, 여호수아와 스룹바벨로 나옵니다.
실제적인 두 사람으로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구약교회)에 힘을 불어넣는 역할을 합니다.
스가랴 4장을 보면 이들의 역할이 나옵니다.
(일곱)촛대(슥4:2)와 두 감람나무(슥4:3)가 나옵니다.
여기서 끝나면 좀 혼동스러울 것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2절에 다시 나옵니다(주의해서 보십시요)
감람나무에서 촛대로 기름을 흘러 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두 가지"가 나옵니다.
두 가지가 바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입니다(14절).
즉 구약교회,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는 자들"입니다.
계시록 11장의 두 촛대는 두 가지의 역할을 합니다.
(두 촛대 = 두 가지)
다시 말해 두 증인의 사명은 "회개시켜 회복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두 선지자"(10) 역시 한번도 모든 성도들이라고 상징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계시록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을 철저하게 구분합니다 - (11:18, 16:6, 17:6, 18:20,
18:24)
"단지 두 명의 선지자"입니다.
2. 두 증인이 활동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1) 거룩한 성(2)
2) 큰 성 =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8) - <실제적으로 볼 때>
소돔, 애굽 - <영적으로 볼 때>
왜 '거룩한 성'(2)이 두 증인이 활동했던 장소일까요? 거룩한 성은 구약적인 표현으로 모두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단9:24, 사48:2).
두 증인은 복음을 순종했던 사람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만
순종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게 갔기 때문입니다.
2절은 두 증인이 복음을 전한 결과 유대인이 돌아 왔을 때, 적그리스도와 세상 나라들의(이방인들)
핍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즉 거룩한 성이 짓 밟힘을 받습니다(2).
혹 '큰 성'이란 표현을 썼기에 이것이 (큰 성) 바벨론을 나타내지 않는가 하는 반문도 있을 수
있습니다. 큰 성 바벨론은 복음을 통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루살렘 성을 큰 성으로 표현합니다. 크신 하나님이 다스리기에 '큰 성'이란
표현을 씁니다.
-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 하도다(시48:2)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8)은 영적인 해석이 아니라 '실제적인 장소'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소돔"이라 불린 곳은 구약성경에서 어디입니까?
어느 것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사1:10, 3:9, 렘23:14, 겔16:46-56, 롬9:29)
영적으로 "애굽"이라 불린 곳은 어디입니까?
1)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버리고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간 죄악된 이스라엘을
책망할 때 사용합니다(호8:13)
2)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기 전, 종의 멍에 아래서 신음하는 곳입니다(출6:6,7, 13:3, 레11:45,
대상17:21). 두 증인 활동했던 장소는 영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모두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3. 두 증인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본질적으로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두 증인은 전한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엘리야와 모세처럼 권능을 보여 줍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표적을
보여 줍니다(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식을 찾으나 - 고전1:22).
두 증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유대인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선지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두 증인의 행적입니다. 두 증인은(선지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던 그곳에서 예수님처럼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부활하고 승천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운명했을때처럼 '지진'도 일어납니다(13, 마27:54)
두 증인이 행했던 복음증거의 핵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진정한 메시아"란 것을
이스라엘에 증거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초림이후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을 향한 그들에게 익숙한 표현입니다.
4. 두 증인과 짐승의 피할 수 없는 싸움
두증인의 증거가 바로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라는 전파는 적그리스도(짐승)에겐 참을 수
없는 모독이며 위협이었습니다. 전삼년반동안 평화의 사도로 위장했던 적그리스도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두 증인을 잡아 죽입니다(7).
이제 짐승의 정체는 확연히 드러납니다.
더군다나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은 이스라엘로 두 증인이 전한 메시지가 참인것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두 증인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며 <거짓인 적그리스도를 버리고> 예수님께 돌아갑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에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방인들과 적그리스도의 짓밟힘입니다(2).
유대인들은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 십분의 일과 칠천명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유대인들의 이런 행동이 일시적이거나 놀래서 보이는 현상이라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 그가(천사)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14:7)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며.. 이런 표현들은 회개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성 십분의 일의 무너짐과 칠천의 죽음은 다음 시간에 다루겠습니다)
5. 1-2절은 결론부분이며, 두 증인이 전한 복음의 결과를 이야기 합니다.
성전을 측량하는 부분입니다.
A(1절에 등장하는 무리)는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로서 측량의 대상이며
보호받습니다
B(2절에 등장하는 무리)는 성전 바깥 마당에 있는 자들로서 측량되지 않고 짓밟힘을 받습니다.
성경은 종종 두 구절을 비교할 때 생략하는 부분이 많기에 세심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1절에 등장하는 성전은 성소를, 제단은 번제단을 말합니다. 구약적 표현으로 신약적으로
명확하게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임재를 통해 예배하는 모든 교회
(온 성도들)를 의미합니다.
2절에 등장하는 '성전 바깥마당'에 있는 사람들은 성막의 울타리 밖의 사람들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2)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잘못된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10:2-3)
이런한 유대인들이 두 증인이 전한(전 삼년반동안) 복음을 끈질기게 거부하다가(계11:9-10),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두 증인을 핍박했던 무리들의 죽임당함을 보며 돌아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이젠 핍박아래 신음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칠십이레의 마지막 이레(7년) 부분과도 연결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굳건한 언약이 적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지고, 전삼년반은 잘 지켜지지만
결국 언약은 파괴되고 이스라엘은 극심한 핍박에 빠지는 것과 동일합니다(단9:27)
결론적으로 두 증인은 두 명의 선지자이며,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 보낸 자들이며,
그들의 사역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됨으로 큰 핍박을 받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짐으로(이스라엘의 회복) 재림의 때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음은 <적그리스도가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났다는 것>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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