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계시록(주제별)

재림이 보인다(21) - "큰 환난"을 이기는 힘의 비밀(계14장)

오은환 2013. 9. 29. 16:51

 

 

"큰 환난"의 날을 감하여 주었지만 우리 성도들에겐 그 시점에서 매우 어려운 날들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24:22)

 

사람편에서 보면 큰 환난을 지혜롭게 이겨 나아가는 것이 큰 관심사입니다.

혼자서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 친척들, 교우들이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어린 아이들을 둔 가정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배고픔, 고문, 배교, 울음소리...어른이야 혼자 감당하고 소망가운데 참는다지만,

자녀들의 신음소리를 듣는 부모의 마음은 무척이나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14장의 144천은 적그리스도의 표를 받지 않고 즉 타협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순교를

당한 자들을묘사하고 있습니다(1-5). 이들 '십사만 사천'은 이미 싸움을 마친 자들로

그들의 이마에는 이긴 자의 표징인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1).

 

저는 7장을 나누면서, 십사만 사천을 인친 이유는 '구별하심'이라 했습니다.

심판 재앙을 실행할 때 의인과 악인을 나누는 일이 인치심입니다.

인치심의 목적은 '재앙에서 의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심판재앙에서 구별되어 보호받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애칭'

입니다(십사만 사천은 누구인가? - 7장 참고)

그 가운데에는 많은 순교자들도 있고, 또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성도들도 있습니다.

다 순교하고 마지막 한 명이 남아도 그 이름은 십사만 사천입니다.

또 깨닫고 돌아온 자들도 그 이름은 십사만 사천입니다.

 

'14장의 십사만 사천'은 적그리스도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했기에 죽임당한 순교자들

입니다(13:15) 그럼 살아서 주님을 맞이한 십사만 사천(성도들)의 이야기는 어디에

있을까요? 15:2-4절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재림 때 살아있던 성도들입니다.

휴거되어 주님을 공중에서 만나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된 성도들입니다.

 

혹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14:4-5절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이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닐까?"

"누가 이처럼 독특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순결한 자/어디든 따라 가는자/처음 익은 열매/흠이 없는 자...

 

이들은 엘리트 신앙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굴복하지 않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4:12) 

 

14장을 통해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 14만 4천(14:1) = 성도(14:12)

 

큰 환난을 가장 잘 이겨나가는 비법(?)은 무엇일까요?

1) 식품을 준비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으로 이스라엘은 3년 6개월간 실제적으로 비 한방울 오지

않았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아합과 이세벨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고 남은

선지자들의 목숨도 위태합니다.

그 때 오바댜는 100 명의 선지자들에게 목숨걸고 음식을 제공했습니다(왕상18:13).

 

그러나 이런 호의는 마지막 적그리스도 때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현대처럼 모든 것이 드러난 시대엔(과거 초대교회 잘 발달된 도시 알렉산드리아

박해 때 순식간에 신자들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처럼) 마땅히 숨겨줄 장소도

없거니와 모두가 심한 경제적인 고통과 생명의 위협을 받기에 오바댜 시대와

비교불가 합니다.

즉 이런 도움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2) 금식이나 경건의 훈련을 준비

평소에 금식이나 경건훈련을 통해 이겨낼 힘을 쌓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이것 자체가 이길 힘을 모두 제공하진 못합니다.

경건의 훈련보다 더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3) 고난과 영광의 비교

사도들은 어떻게 심한 고난을 이겨냈을까요?

체력적으로 뛰어났거나 인내심으로 가득차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심한 고난을 넉넉히 이겨냈고, 오히려 크게 기뻐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처럼 되어야 합니다.

사도들의 승리는 간단합니다. 장차 올 큰 영광을 보았고, 알았기 때문에 능히 이겼습니다.

 

-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고후4:18)

 

☆ '환란이 크게 보이는 것'은 영광이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영광, 지극히 큰 영광을 보게 된다면

 

환란은 너무도 가볍고 가치적으로 비교불가 합니다.

이런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영광을 제대로 알고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15장 부활장처럼, 너무도 영광스러운 성도들의 모습을 보았기에,

전도하는 일에나 그들을 섬기는 일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알았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계시록은 이런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존재임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예루살렘 성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그 안의 모든 보화들을 누리는 영광스러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사치가 아니라 근원이며 힘이 됩니다. 영광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우리의 신앙적 열정은 불타오를 것입니다)

 

☆ 베드로 사도 역시 그렇습니다. 고난과 영광의 함수 관계를 잘 이야기 합니다.

 

-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사도들은 고난을 당할 때 반드시 영광을 생각하며 이겼습니다.

-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

 

그래서 고난을 영광을 위한 귀한 도구로 간주합니다.

-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