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계시록(주제별)

재림이 보인다(19) - 예비처는 어디에 있는가?(계12장)|

오은환 2013. 9. 29. 16:49

광범위한 사건들을 다룰 땐 먼저 간단하게 정리하는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12장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정리합니다.

제일 먼저, 가장 쉽게 정리되는 것은 '큰 붉은 용'(3)으로 마귀, 사탄,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9)

(더 이상 논할게 없습니다)

 

두번째로, 정체성이 뚜렷하게 나오는것은 여자가 낳은 아이 즉 남자입니다(2,5)

여자가 낳은 아이의 뚜렷한 특징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입니다(5).

계시록 내에서 '3 번' 에 걸쳐 나오는 이 특징은 매우 중요합니다(5, 2:26-27, 19:15, 시2:9).

2:26-27절에는 이기는 자들도 예수님처럼 그런 권세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철장으로 다스릴 권세자는 바로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님입니다.

 

그럼 남자 아이를 낳은 여자는 누구입니까?

계시된 말씀 안에서 구체적으로 보면 구약교회입니다.

일반적으로 통일된 교회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저는 먼저 구체적으로 보고 통일된 모습도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교회 즉 옛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을 통해 오셨습니다.

혈통적으로나 언약적으로나 순서가 그렇습니다.

 

-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 - 이스라엘>에게서 나셨으니(롬9:5)

 

-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롬9:4)

 

바울은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이 교회의 뿌리이며 중심이라고 강조합니다.

신약에 태동된 교회는 좀 심한 표현으로 접붙임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롬11:17)

(접붙임 시키는 것을 시골에서 살아서 종종 보았는데 줄기 눈을 일부 잘라서 원가지에 꼭 감싸

붙여 놓았던 것 같습니다. 저렇게 해서 살겠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별로 할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인데 어떻게 구약교회가 예수님을 탄생시킬 수 있겠는가?

구약의 성도들은 오랜 시간동안 메시아가 오기를 대망했습니다.

 

-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행26:7)

 

교회의 간절한 부르짖음 속에서 오신 메시아가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구약교회로 표현된 여자는 13-16절에 잘 나타납니다).

 

그럼 구약교회로 인하여 태동된 신약교회는 어디 있습니까?

'여자의 남은 자손'입니다(17)

자 여기서 우리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여자(구약교회)와 남은 자손은(신약교회)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 나뉘지 않고, 서로 헤어지지 않고 하나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돌아오고 있지 않지만,

신약교회는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을 통해 낳아졌고 양육되었습니다.

열 두 사도 역시 이스라엘 사람이지 않습니까?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면,

여자 - 구약교회

남자아이 - 예수님

큰 붉은 용 - 사탄

여자의 남은 자손 - 신약교회(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하나된 교회)

 

예비처에 대한 문제는,

1. 예비처란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비처를 정의하면 사탄의 핍박을 피하고 양육된 곳으로 정의합니다(6, 14).

 

2. 그곳은 어디입니까?

광야로 표현되며(6, 14),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통해 이곳에 와 있다고 합니다(14).

자, 여기서 우리는 좀 더 깊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비처라는 곳은 특정한 지역적인 장소를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을 의미하는가?

대체로 이 두 가지 문제로 직결됩니다.

 

먼저 다루어야 할 견해로 특정한 장소라는 것입니다. 성도를 핍박하는 무리들이

알 수도 없고, 감히 침범할 수도 없는 그런 장소가 있다고 하는 분들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특정한 장소가 결코 아닙니다.

 

구약교회가 받았던 고난을 표현합니다(13-16).

구약교회가 예비하신 곳에서 양육을 받지만 그곳에도 역시 사탄의 강한 공격이 지속됩니다.

거대한 강물로 구약교회를 파멸시키려 합니다(15).

그렇지만 땅이 입을 벌려 그 물을 삼켜버립니다.

 

이것은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이 거대한 무리들과 함께 당을 지어 공격을 할 때 위태한

구약교회의 모습입니다.

모세의 편에 선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그들이 산채로 음부에 던져집니다.

 

'땅이 그 입을 열어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민16:32-33)

 

구약 교회가 예비하신 곳(예비처)에 있었지만 엄청난 고난 가운데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예비처는 고립된 특정한 지상의 장소가 아닙니다.

 

신약교회에 등장하는 예비처 역시 똑 같습니다(17). 여자를 통해 태동된 남은 자손들 역시

사탄과 거대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만 예비처가 있었고 신약은 없다고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반대 역시 그렇습니다.

 

'큰 독수리 두 날개로 옮겨졌단 말' 이해하면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14).

 

이 말은 성령의 보호아래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창1:2절에서 부터 시작된 성령의 강한 역사는 성도들을 어려움 가운데서 선하게 아름답게

인도하십니다.

이 말은 구약적 표현으로 출애굽 때 사용되었습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되었던

이스라엘을 나오게 하셨던 일을 기억하며 하신 말씀입니다.

 

-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

  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19:4)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날아서 광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왕과 강한 군대들과 당대 최강국이던

애굽 사람들 틈새에서 힘들게 있다가 떳떳하게 나온 것입니다. 험한 세상 가운데 있었지만, 강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애굽에서 나왔단 이야기입니다.

 

큰 독수리의 두 날개는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하심을 의미하며 결코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속입니다.

그곳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곳입니다.

 

-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36:7)

-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시91:4)

 

그래도 특정한 장소라고 강하게 주장하신다면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시11:1)

 

좀 더 문제의 근원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환난 전 휴거 주장/예비처가 특정한 장소로 보는 견해는 결국 무슨 연유에서 나왔을까요?

 

1) 성도의 특권 - 그동안 고생했으닌까 이 정도의 특권을 가질 수 있다는 이유

 

2) 고난 - 육체를 가진 어떤 성도들도 적그리스도의 무시무시한 고난을 이길 수 없다는 이유

 

3) 구별하심 - 심판재앙들(인, 나팔, 대접)이 내릴 때 성도와 악인이 섞여 있으면 성도들도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함(즉 하나님의 구별하심에 대해 알지 못함)

 

4) 괜한 고생을 굳이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 - 악인들이 받는 고난 때문에 성도들까지 힘들게

   되면 불편하다는 이야기

제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재앙의 가장 큰 특징은 의인과 악인의 구별하심입니다.

14만 4천의 인치심의 목적도 성도들을 심판재앙에서 구별하여 보호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에서 철저하게 구별하신 것처럼(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하나님의

심판 재앙에서 구별하기에 환난 전 휴거가 불필요하고, 예비처라는 곳을 특정한 장소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혹 적그리스도의 박해가 너무 심하니 공중으로 휴거되거나(이중재림), 특정한 도피처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날들을 감하여 주었습니다(마24:22).

 

고난에 대한 바른 정립이 필요합니다.

고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성도는 현재뿐만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그 힘든 시기에 고난이 친구처럼 따라 다닐 것입니다.

 

그런 고난을 왜 주셨을까요?

나 혼자만 구원받는 것이 최선이 아닙니다. 성도는 연약한 지체들이나 불경건한 사람들,

악인들까지도 사랑하고 마지막까지 돕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자연계에 재앙들이 내리면 악인들이 힘들겠지요,

스스로 움직이는 자연이라 생각했는데 자기들 맘대로 안되니 분통 터질 것입니다.

악인들에게 일반은총을 거두어 갈 때 성도들은 어려움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직간접적으로 손해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악인들에게는 심판이지만 성도들에겐 악인들 때문에 고통이 수반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난을 이렇게 말합니다.

 

-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골1:28) 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며, 해산의

고통입니다(갈4:19)

고난을 피하기 위해 환난 전 휴거나 특정한 장소의 예비처로 옮겨진다면 누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과, 악인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지 않으려 한다면 참된 일군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는 존재의 관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관점'에서 이 문제들을 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