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K 비일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요한이 계시를 보았지만 그대로 전하지 않고 나름대로 정리하고 교정해서 전달했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비일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라는 측면에서 독특한 주장을 합니다.
예수께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명령한 것보다도 요한이 일곱이란 숫자를 택해서 <의도적으로>
편지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이 7이란 숫자를 사용한 것은 틀림없이 구약에서 선호되는 숫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p.324)
요한이 일곱 교회를 선택해서 편지를 기록했다면 그 내용들은 모두 요한이 만든 소설입니까?
요한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이런 접근은 반드시 철회되어야 합니다.
*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계1:4)
*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계1:11)
비일의 해석은 핵심을 피해 갑니다.
*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계1:4)
비일은 이 본문 자체를 해석하지 않고 이 구절이 어디서 유래되었는가만 찾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전하려는 것일까요?
요한이 계시를 통해 받은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을 이곳저곳 들추어 이런 말을 했다고
주장하려 합니다.
"이사야(41:4, 43:10, 44:6, 48:12), 출애굽기(3:14), 신명기(32:39), 시편(72:1)...
요한이 신32:39만을 의존한 것 같지는 않다. 그 문구의 첫 번째와 마지막 요소가 요한의 문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은 앞에 열거한 출3:14을 확장한 여러 본문들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전통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더 많다"(p.326)
비일은 매우 중요한 이 구절에 대해 누가 말했는지, 그 분이 언제 오겠다는 것인지 침묵합니다.
계1:8절에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이렇게 말하는 데도
요한이 구약 어디서 찾아왔는지 엉뚱한 것만 찾고 있습니다.
요한에게 주신 계시를 요한이 만든 계시로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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