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이신칭의가 성경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이 원리에 근거해서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런 원리로 복음서를 주석하며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졌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이신칭의로 주석하기 어려운 구절들을 만났습니다.
<열매로 알리라>를 쓰신 정훈택 총신 교수님은 박윤선 박사에 대해 냉혹한 판단을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구절을 통해 이신칭의 구절은 난관에 봉착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구절을 이신칭의라는 잣대로 보지 말고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처럼 남겨두라고 합니다.
억지로 해석하려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결론적으로 정훈택 교수는 이신칭의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신약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에서 사용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매우 타당한 지적입니다.
복음서는 이신칭의를 기본으로 합니다.
이미 구약성도들은 자신들이 믿음으로 의롭게된 존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신칭의를 얻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연합된 존재들은 그에 합당한 생활을 보여야 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를 그들의 행위에서
보겠다는 것이 주님의 일관된 주장이자 관점입니다.
이신칭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분리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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