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이신칭의는 찾을 수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갔고 부자는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갔다는 내용이
없으니 난감합니다.
오히려 이곳 비유는 <행위>에 근거해서 천국으로 혹은 지옥으로 갔음을 드러냅니다.
그 행위의 기준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 입니다(눅16:29).
마치 예수님이 이곳저곳 다니면서 전한 메시지와 동일합니다.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영생을 얻는 길이 이신칭의라는 틀을 무시한 채 행함으로 증명하라는 명령처럼 보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명령들을(마7:12) 행하면 영생이 주어지듯이 들립니다.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10:25-28)
복음서를 읽으면 이신칭의 개념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구약과 신약의 구원이 각각 다를까요?
절대 아닙니다.
구약 성도들이 의롭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합니다.
그것을 믿음으로(이신칭의) 의롭게 된 것을 전제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과 삶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예수 안에서 정결하게 되고 성령이 내주한 거듭난 자는 삶에서도 그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하며 기뻐하는 삶이 바로 예수 안에 거하는 증거가 됩니다.
바울 서신을 읽다보면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과 이후 성도의 삶의 관계에 대해 계속해서 다뤄줍니다.
서신의 전반부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의 정체성과 그것을 바탕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은 서로 나눌 수 없는 하나됨을 말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