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노예 문제에 대해 조용합니다.
잘못된 제도를 바꾸며 노예들을 자유한 지체로 맞이하라고 부탁할 듯 하는 데도
그는 그 문제를 못본 듯 외면합니다.
*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빌1:16)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멀리 자유자로 보내지 않고 그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육체적으로는 노예지만 주 안에서 자유자로 대하라 권면합니다.
왜 바울은 로마제국과 전세계에 만연한 노예제도에 관하여 시원한 표현을 하지 않을까요?
먼저 알 것은 바울은 노예제도를 반대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레25:39-40)
한편으로 세상에서 만연한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대로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노예제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악한 제도임을 알고 고칠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 상황에서는 제도만 바꾼다고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오늘날도 경제적 예속으로 인하여 명목상은 자유롭지만 실질적으로 노예관계가 설정된 곳이
많습니다. 그곳에서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의 여러 농장에서 일하는 어린 아이들이나 가난한 자들은 하루벌어 가족들이 먹고살기도
어렵습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종과 주인들에게 말씀을 통해 어떻게 행할 것을 알려줍니다.
종들과 주인들 모두에게 책임감을 부여합니다.
순종과 공평함으로 관계를 유지하라 명합니다(엡6:5-9).
노예제도는 그 자체가 사라졌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유사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악한 제도를 이용하지 말고 사랑으로 아름다운 관계를 만드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