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학원 다닐 때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 나오는 보혜사에 대해 배우는데 서OO 교수님의 설명이 도무지 애매했습니다.
보혜사는 두 분이 계시는데 원 보혜사는 예수님 자신이고, 또 다른 보혜사는 그분이 보낸 영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듣다보니 더 오락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원 보혜사는 예수님이고, 또 다른 보혜사 역시 예수님이 영으로 오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론은 그 교수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개혁신학자의 상당수가 받아들이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 교수님의 권위에 눌러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습니다.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질문을 너무 무시했고, 학생들은 그분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닌 것 같다라고 말은 할 수 있지만 정답을 제시하기에는 너무 아는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난 후 여러 의견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상식적으로 나오는 답은 이렇습니다.
"원 보혜사는 예수님이고, 또 다른 보혜사는 예수님이 보낸 성령님이다"
이 정도의 답을 듣고 만족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함께 하셨던 성령님은 누구인가 하는 것과,
구약성도들에게 나타난 성령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원 보혜사는 구약시대부터 계셨고 오순절 성령 이전까지 활동하신 아버지의 성령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는 오순절 날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아(아버지의 성령) 자신의 이름으로 보낸 성령(예수의 영)임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는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은 자의로 행하지 않고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 일하십니다.
성령님은 보내신 분의 이름을 따라, 구약에는 <아버지의 성령>, 신약에는 <예수의 영>으로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것을 완전히 알고 난 후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성령님을 하나님의 성령이라고도 하고 주님의 영이라고도 부릅니다(행5:9, 16:7, 벧전1:11, 고전2:14, 3:16, 6:11, 엡4:30, 빌3:3)
오순절 이후에는 예수님이 보내셨는데도 하나님도 보냈다고 자유롭게 사용합니다(행5:32)
모두 맞는 말씀입니다. 보혜사는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4:4)
예수님도 <원 보혜사>나 <또 다른 보혜사>나 <같은 성령님>이라 말씀하십니다.
장차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받는 큰 환난에서 함께 하실 분이 계시는데 그 이름이 <아버지의 성령>이라 합니다.
굳이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두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20)
보혜사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면서도 역시 동일하게 한 분 성령님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이 보낼 또 다른 보혜사는 생소한 분이 아니라, 이미 제자들과 구약 성도들 가운데서 친근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성령이라 알려줍니다.
* 그는(또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이라, 세상(이방인)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위 구절은 너무너무 중요한 부분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가장 큰 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깨끗하게 됨과 더불어 성령의 내주로 거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백성들이 받은 복음의 복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온전한 상태에 대해 이스라엘의 복을 언급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 결과 성령의 내주로부터 시작됩니다(갈3:14).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복을 이미 구약시대부터 받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 이스라엘은 보혜사 성령님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현재 너희와 함께 거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 보혜사 성령님은 장래에도(미래시제 사용) 계시겠다고 알려줍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은 이런 의미에서 보혜사에 대한 가장 명확한 답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도들이 성령이 내주하는 거룩한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해서(고후6:16, 약4:5), 이 땅의 수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이 여전히 구약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약성도들의 구원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결국 신약의 구원 역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보혜사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바로 잡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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