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찌보면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을까 할 정도로 긴박한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C.C.C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영리를 가지고 실습까지 해보고 현장에서 전도도 해 보았습니다.
이후 이런 영향 아래서 수련회 시간마다 중고등부와 청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전했습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이것은 입술로 고백한 순간 확정된다"
배웠던 것이 현장에서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 것입니다.
사람은 배우지 않는 것을 확신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드라나, 연극, 영화 배우가 아닌 이상 마음에 없는 것을 확신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사기꾼>이 되고 맙니다.
어느 순간 제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 진리인가 하는 섬뜻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자로서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가 하는 무거운 마음이 짓눌렀습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의 확신이란 용어는 절반은 맞고 나머지는 틀렸습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 그리고 신약의 복음전도자들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역시 구원의 확신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구원의 보증>을 철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보증>이 있으면 확신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신은 있으면서 <보증>이 없다면 빈수레에 불과합니다.
확신이라는 것은 사람이 중심이 되어 나온 이론입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하여 무엇이라 증거할까요?
구원이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즉 유업을 얻는 것, 영생을 취하는 것, 천국에 들어가는 것...
이런 표현들은 모두 동일한 것으로 서로같지만 다양하게 표현한 것들입니다(마19:16,23-25).
구원은 철저하게 성령의 내주하심의 결과 선물로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신자가 성령을 반역하면 떠나갑니다.
그 순간 촛대가 옮겨진 것으로(계2:5), 성령이 없는 자가 되며(유1:19), 성령이 소멸되게 됩니다(살전5:19).
성령의 내주가 곧 구원의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근심(반역 - 사63:10)하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성령의 내주하시고 인도하심이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위 구절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명확한 진리를 알려줍니다.
성령의 내주가 곧 구원의 보증이란 말입니다.
구원이 과거 어느 한 순간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구원이 완성되어지는 날까지 성령이 보증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이 내주하고 보증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매순간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증거하며,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성도에게 가장 역동적인 삶을 부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우리를 최고로 사랑하듯이 우리도 아버지와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며 신랑과 신부처럼 살고자 함입니다.
성령의 보증은 성도들이 부활체로 변화하는 것까지 확대됩니다.
단순히 확신한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실제로 내주하여 <보증할 때> 그런 일이 일어 납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성령의 역사로 부활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 곧 이것을(성도의 부활)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5:5)
그러므로 구원이란 성령의 보증이 있을 때 그것이 확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 순간 사건이 아니라 일평생 동안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부담으로 여기는 것은 진정한 복음에 있지 않는다는 외적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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