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사색

교단 분열 : 최상의 선택인가? 최악의 선택인가?

오은환 2020. 7. 19. 21:30

1979년과 1980년, 거의 일 년 간격으로 합동(총신대학원)교단은 분열을 경험합니다.

둘 다 교권을 장악한 자들의 전횡으로 숨쉬기 조차 힘들어진 상태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교단이 정치화되면 나타나는 부패의 찌꺼지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분열의 역사를 보면 아쉽습니다.
"그 때 좀 더 참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제가 자랐던 시골교회 목사님이 은퇴 후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당시 전라도 목회자들이 수모를 많이 겪었기에 더 이상 굴욕을 당하기 싫어

어쩔 수 없이 교단분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1979년 합동과 합동보수의 분열입니다.

 

제가 신대원을 다니던 시절에는 분열되었던 합동신학원 교수들과 학생 몇이

총신 채플 시간에 참석해서 곧 교단이 합쳐질 것이라 낙관했습니다.

그렇지만 25년이 지난 시간이 되어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합신의 조진모 역사신학 교수의 글입니다.

 

"조진모 교수 (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합신’으로 알려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는 1980년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합동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지만, 1984년에 대학령에 준하여 ‘합동신학교’로 인가를 얻었으며 1996년에 단설 신학대학원으로 인가를 받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로 개칭되었다. (중략)

 

합신이 총신으로부터 분립된 것은 1980년 10월의 일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총신에서 가르치고 있던 신복윤(조직신학), 윤영탁(구약), 김명혁(교회사), 그리고 박형룡(신약) 등 4명의 교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 총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정암(박윤선 박사의 호, 당시 75세)에게 새로운 신학교를 출범하는 일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정암은 어느 정도의 생각할 시간을 가진 후 결단을 내리고 교장직을 맡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총신의 주요 교수들이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였는가? 또 하나의 신학교가 반드시 세워져야 할 필요가 있었는가? 『합동신학대학원 20년사』에서는 합동신학대학원이 설립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교권주의자들의 횡포를 개혁함, 2) 지역주의가 빚은 총회 분열, 3) 교단을 방관하는 잘못된 교회관, 4) 교리와 생활이 분리된 형식주의, 5) 교육자의 양심을 지키는 길을 선택함.

 

그 당시 위에 언급된 4인의 총신 교수들은 총신에서는 더 이상 올바른 신학 수업이 불가능하다는 데 동의하였다. 그 이유는 수년 전부터 합동교단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여 지나친 교권주의의 남발로 인하여 후학을 양성해야 할 신학교의 기본적 사명조차 다할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정암도 1980년 4월에 총신의 학장 서리를 맡았지만,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한 특정 인물이 학교에 간섭하는 상황에서 도저히 학원의 정상화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사임한 상태였다. 그 당시 학교 내의 문제는 외부로 널리 알려진 한국 기독교계의 커다란 뉴스거리였다. 특히 1979년 9월 총회에서는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이 있었기 때문에 온 교계의 시선이 총신의 사태를 집중되어 있었다"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의 간략한 역사 중에서 발췌)

 

합신의 분열 역시 교권을 장악한 자들의 무소불위에 한계를 느꼈기에 일어났습니다.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봅니다.

"교단분열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교단분열의 원인 제공자들은 어떤 생각을 지녔다가 죽었을까요?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던 것이 최선이었을까?"

 

총신은 계속해서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보수신학을 제대로 지키고 발전시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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