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복음서

산상수훈에 대한 12가지 해석들

오은환 2020. 11. 30. 13:51

이 글은 신학지남 1998년 여름호에 실린 이한수 교수님의 논문에서 발췌했습니다.

원 제목은 <산상설교 : 그 성경과 목적 연구>입니다.

저자 이한수 교수님은 현재까지 12가지 산상수훈 해석들이 존재하지만

만족할 만한 설명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결론짓습니다.

 

저자는 맥아더(H.A McArthur)의 견해를 따라 12가지 해석들을 소개합니다(p.57-58).

 

- 팔복교회 -

 

1. 절대주의자 견해

이 견해는 산상설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문자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2. 수정주의자 견해

이 견해는 수정주의적 문구들을 산상설교의 계명에 도입하여 그 절대적 성격을 완와해

보고자 한다.

 

3. 과장법 견해

이 견해는 예수께서 자신의 도덕적 요구들을 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과장법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에서 통찰을 얻어 산상설교를 일종의 과장법적인 교훈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4. 일반 원리론 견해

이 견해는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강조하신 것은 일상적인 실제의 행동들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안내할 수 있는 원칙들을 천명하신 것으로 본다.

 

5. 행동이 아니라 태도를 중시한다는 견해

이 견해는 예수의 진짜 관심이 실제적인 행동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 배후에 놓여있는

새로운 심성 또는 삶의 새로운 태도나 정신에 있다고 본다.

 

6. 이중 표준의 견해

이 견해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견해인데, 예수의 교훈들을 두 개의

다른 범주들로 구분한다. 예를 들면 '계명과 조언'을 구분하여, 전자는 구원과 관계가 되고,

후자는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관계된다.

가톨릭 교회는 잘 알려진대로 평신도와 사제 계층을 분리시켜 예수의 교훈들을 평신도와

사제들에게 따로 따로 적용하고 있다.

(아마도 천주교는 산상수훈을 구원과는 무관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숙의 범주로 놓은 듯

합니다.)

 

7. 두 영역론 견해

루터가 이 견해를 옹호했는데 그는 인간의 삶의 행위를 두 개의 영역들로, 즉 세상 영역과

영적인 영역으로 구분하며, 기독교인들은 이 두 영역에 모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8. 성경의 유추론 견해

이 견해는 산상설교를 신약이나 구약에 나타난 다른 교훈들을 참조하여 해석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9. 중간기 윤리 견해

슈바이처(A. Schweitzer)에 의해 피력된 이 견해는 임박한 역사의 종말에 직면하여

산상설교의 교훈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직전 짧은 잠정적 중간 시기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윤리로 고안 되었다고 본다.

 

10. 현대 세대주의적 견해

이 견해는 산상설교의 윤리가 신자들의 현세적 삶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미래 왕국

세대를 위해 의도된 윤리라고 본다.

따라서 그것은 현세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지 부차적인 의의를 지닐 뿐이다.

 

11. 회개론적 견해 - 박윤선 박사나 장로교의 일반적인 접근?

이 견해는 산상설교의 일차적인 기능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성을 깨닫게 하여

회개케 하려는 것이라고 본다.

 

12. 무제약적 신의지론 견해

이 견해는 독일의 학자 디벨리우스(M. Dibelius)에 의해 옹호되었는데, 예수의 윤리적

요구들이 비록 절대적이고 무제약적인 윤리이기는 하지만, 제자들은 세상적 현실과

제약들에 비추어 적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기본적 가정에 근거해 있는 해석이다.

 

- 감람산 -

 

박윤선 박사는 11번째 견해를 취했습니다.

이런 선택은 그의 신학적 배경을 따라 행한 것으로 바울의 이신칭의를 바탕으로

예수의 산상수훈을 정리하고자 함입니다.

 

그는 바울신학을 더 발전된 계시로 보고 예수의 가르침은 덜 발전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행위를 강조하는 산상설교의 예수의 교훈들은 그리스도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율법조항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실제 생활과는 직접 관련이 없고, 다만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보여주려고 실천불가능한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 논문을 쓴 이한수 교수의 생각은 어떨까요?

산상수훈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유대적 정황을 파악하려 합니다.

산상수훈을 기록한 마태가 참고한 것은 모세오경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산상수훈과 모세가 전해준 율법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찾으려 합니다.

새 언약과 옛 언약 사이에서 윤리가 보존되거나 변경 될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모세 율법과 관련하여 예수의 교훈이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이것은 옛 언약의 어떤 측면들이 수정되거나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p.65)

 

이런 관점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깊은 논쟁의 늪에 빠져 들 것입니다.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윤리를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신구약 성도들이 어떻게 동일한 율법을 지킬 수 있거나 혹은 지킬 수 없거나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성도가 윤리를 수행함에서 있어서 자신의 지정의로 행한다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

못됩니다.

성도는 성령과 연합되어, 성령의 힘주심을 공급받아서 윤리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도들 역시 성령이 내주했느냐, 아니했느냐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만일 구약 성도들이 신약 성도들처럼 성령이 내주했다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모세의 율법이나 산상수훈이나 성령의 힘주심으로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