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학지남 1998년 여름호에 실린 이한수 교수님의 논문에서 발췌했습니다.
원 제목은 <산상설교 : 그 성경과 목적 연구>입니다.
저자 이한수 교수님은 현재까지 12가지 산상수훈 해석들이 존재하지만
만족할 만한 설명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결론짓습니다.
저자는 맥아더(H.A McArthur)의 견해를 따라 12가지 해석들을 소개합니다(p.57-58).
1. 절대주의자 견해
이 견해는 산상설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문자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2. 수정주의자 견해
이 견해는 수정주의적 문구들을 산상설교의 계명에 도입하여 그 절대적 성격을 완와해
보고자 한다.
3. 과장법 견해
이 견해는 예수께서 자신의 도덕적 요구들을 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과장법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에서 통찰을 얻어 산상설교를 일종의 과장법적인 교훈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4. 일반 원리론 견해
이 견해는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강조하신 것은 일상적인 실제의 행동들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안내할 수 있는 원칙들을 천명하신 것으로 본다.
5. 행동이 아니라 태도를 중시한다는 견해
이 견해는 예수의 진짜 관심이 실제적인 행동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 배후에 놓여있는
새로운 심성 또는 삶의 새로운 태도나 정신에 있다고 본다.
6. 이중 표준의 견해
이 견해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견해인데, 예수의 교훈들을 두 개의
다른 범주들로 구분한다. 예를 들면 '계명과 조언'을 구분하여, 전자는 구원과 관계가 되고,
후자는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관계된다.
가톨릭 교회는 잘 알려진대로 평신도와 사제 계층을 분리시켜 예수의 교훈들을 평신도와
사제들에게 따로 따로 적용하고 있다.
(아마도 천주교는 산상수훈을 구원과는 무관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숙의 범주로 놓은 듯
합니다.)
7. 두 영역론 견해
루터가 이 견해를 옹호했는데 그는 인간의 삶의 행위를 두 개의 영역들로, 즉 세상 영역과
영적인 영역으로 구분하며, 기독교인들은 이 두 영역에 모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8. 성경의 유추론 견해
이 견해는 산상설교를 신약이나 구약에 나타난 다른 교훈들을 참조하여 해석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9. 중간기 윤리 견해
슈바이처(A. Schweitzer)에 의해 피력된 이 견해는 임박한 역사의 종말에 직면하여
산상설교의 교훈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직전 짧은 잠정적 중간 시기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윤리로 고안 되었다고 본다.
10. 현대 세대주의적 견해
이 견해는 산상설교의 윤리가 신자들의 현세적 삶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미래 왕국
세대를 위해 의도된 윤리라고 본다.
따라서 그것은 현세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지 부차적인 의의를 지닐 뿐이다.
11. 회개론적 견해 - 박윤선 박사나 장로교의 일반적인 접근?
이 견해는 산상설교의 일차적인 기능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성을 깨닫게 하여
회개케 하려는 것이라고 본다.
12. 무제약적 신의지론 견해
이 견해는 독일의 학자 디벨리우스(M. Dibelius)에 의해 옹호되었는데, 예수의 윤리적
요구들이 비록 절대적이고 무제약적인 윤리이기는 하지만, 제자들은 세상적 현실과
제약들에 비추어 적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기본적 가정에 근거해 있는 해석이다.
박윤선 박사는 11번째 견해를 취했습니다.
이런 선택은 그의 신학적 배경을 따라 행한 것으로 바울의 이신칭의를 바탕으로
예수의 산상수훈을 정리하고자 함입니다.
그는 바울신학을 더 발전된 계시로 보고 예수의 가르침은 덜 발전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행위를 강조하는 산상설교의 예수의 교훈들은 그리스도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율법조항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실제 생활과는 직접 관련이 없고, 다만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보여주려고 실천불가능한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 논문을 쓴 이한수 교수의 생각은 어떨까요?
산상수훈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유대적 정황을 파악하려 합니다.
산상수훈을 기록한 마태가 참고한 것은 모세오경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산상수훈과 모세가 전해준 율법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찾으려 합니다.
새 언약과 옛 언약 사이에서 윤리가 보존되거나 변경 될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모세 율법과 관련하여 예수의 교훈이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이것은 옛 언약의 어떤 측면들이 수정되거나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p.65)
이런 관점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깊은 논쟁의 늪에 빠져 들 것입니다.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윤리를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신구약 성도들이 어떻게 동일한 율법을 지킬 수 있거나 혹은 지킬 수 없거나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성도가 윤리를 수행함에서 있어서 자신의 지정의로 행한다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
못됩니다.
성도는 성령과 연합되어, 성령의 힘주심을 공급받아서 윤리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도들 역시 성령이 내주했느냐, 아니했느냐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만일 구약 성도들이 신약 성도들처럼 성령이 내주했다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모세의 율법이나 산상수훈이나 성령의 힘주심으로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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