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저에게 신학하는 방법을 물어보곤 합니다.
어떻게 해야 바르게 신학을 정립할 수 있는지는 모두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신학의 깊이와 넓이는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만큼 크고 깊고 넓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분야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바른 방법으로 신학을 세워나가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종교 개혁시대 이전 학문적 도구 - 성경, 원어, 자국어 성경 - 를 가지지 않았던 청중들을
향해 성경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셨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계시록처럼 읽고, 듣고 하는 수준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성경 연구의 틀로 보입니다.
*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내러티브 신학>은 정승원 교수가 쓴 권두언입니다.
(신학지남, 2022년 겨울호, 통권 353호)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내러티브 신학의 장단점들을 언급합니다.
"'내러티브 신학' 혹은 '이야기 신학'이라고도 하는 이 신학은 1970년대에 출현한
상대적으로 최근 신학이다. 이 신학은 주로 성경 해석학에 주안점을 두며,
조직 신학적 정통 신학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계몽주의적 자유주의 신학과의
차별화를 추구한다."(p. 3)
"이스라엘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와 이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주로 내러티브로 작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는 내러티브 신학은 우리고 하여금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세계에 매이지 않고, 몰역사적(ahistorical) 교리와 전통에서
벗어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신앙의 삶에 초점을 두도록 도와준다."(p. 3)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이신 정승원 교수는 이 글을 통해 내러티브의 유익한 점을 보되,
조직신학적인 측면의 유익함을 버리는 것을 경계합니다.
내러티브 신학이 기존의 교리신학을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신학을 한다는 것, 조직신학 중심적인 것이나 이야기 신학으로 들어가자는 것 등은
신학을 어떻게 형성 할 것인가라는 숙제를 던져 줍니다.
이 둘을 서로 대립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깊이의 차이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이야기 형태로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조직신학적으로 볼 때
든든하다는 것은 배제할 수 없는 사실들입니다.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면서도 틀을 견고히 할 수 있는 진리들이 있음이 병행된다면
만족스럽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조직신학적 접근이 오늘날처럼 언어 연구나 철학적 사고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구약 같은 경우나 신약 성경이나 종교개혁 이전까지 곧 인쇄술이 발전하기 까지는
이야기 식으로 전달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성경을 알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니고데모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면 성경을 연구하던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많은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 시대에도 그런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진리의 전문가라고 하지 않은지
염려가 됩니다.
'24. 신학지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용도 목사의 신학과 그의 부흥회 (1) | 2023.10.07 |
---|---|
샌더스(E.P. Sanders)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한 재고(再考) (0) | 2023.05.22 |
신명기의 구원 사상(김영욱 교수) (0) | 2023.05.20 |
일곱대접재앙(계16:1-21)의 석의와 신학적 의미 - 김대훈 교수 (0) | 2023.05.20 |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0) | 2023.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