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베소 교회에 침투한 이단 영지주의
어떤 자들은 초대교회를 너무 미화하려고 합니다.
그때는 좋았고 지금은 타락했다는 논지로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초대교회의 순수함과 뜨거움은 본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는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국가적인 강한 핍박을 가했고, 내부적으로는 이단들을 일으켜서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미혹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수많은 문제들을 일으켰는데 오늘날에도 보기 어려운 난잡한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수도였던 에베소는 대도시로서 선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뿌리를 내리려 발버둥을 쳤습니다.
‘니골라’로 부르던 일곱 집사 가운데 한 명이 영지주의에 빠졌습니다(행6:5,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니골라는 일곱 집사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그에게만 장황한
설명이 따라옵니다. 마치 가룟 유다가 맨 마지막에 나오면서 긴 설명이 나온 것과 같습니다.
영지주의에 빠진 니골라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고 오직 영으로만 왔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대속사역을 부인하며 단순히 사람들에게 신에 대한 ‘신령한 지식’
(영적인 지식 = 영지주의)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런 지식을 깨닫기만 하면 최고의 신에게 도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이 구속주이심을 주장할 리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불필요하기에 성육신을 부정했습니다.
요한일서는 이런 사악한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바른 복음을 붙잡고 있으라 권면하며,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신령한 지식(영지)’은 진리가 아니라, 사도들이 전해준 처음 말씀
(사랑, 복음)이 진짜이기에 그 안에 머물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참 진리를 가르쳐 주었기에 영지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를 이런 배경 없이 읽으면 큰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2. 처음 들은 것(요일2:24) = 사도들의 복음(폴리갑) = 처음 사랑(계2:4) = 처음 행위(계2:5)
요한일서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정의를 내려줍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5:3)
사도들이 전해준 처음 사랑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하면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회복하라)고도 합니다(계2:4,5).
에베소 교회 이야기를 읽다가 헷갈리는 것이 뭘까요?
‘너’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 했는데, 여기서 너는 단수입니다.
그래서 착각하기를 에베소 교회 전체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니골라당과 싸운 자들을 칭찬하는데, 똑같이 ‘너’라고 말합니다.
단수를 사용해서 모두가 싸운 것처럼 말하지만 요한일서나 ‘이그나티우스 편지’를 통해 보면
에베소 교회 가운데 일부는 싸웠고, 일부는 미혹되어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라는 표현을 지혜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계시록의 나머지 여섯 교회들도 역시 그렇게 주의하면서 보면 훨씬 정확하게 이해가 됩니다.
3. 성경을 읽는 지혜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성경의 다른 곳들을 찾아서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보면 엇나가지
않습니다. 기록시기를 보면 요한일서는 주후 90년경, 계시록은 96년경으로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동일한 문제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에베소 교회나 나머지 여섯 교회들도 모두 에베소 지역(당대의 수도)의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칭찬만 받은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도 실상은 이런
영지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다 이겨냈습니다.
주후 108년 곧 계시록이 쓰인 후 약 10년 후에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역시 동일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사도들이 전해준 <처음 복음>을 떠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만일 돌아온다면 용서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단순히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고 이단으로 갔고, 교회를 완전히 떠났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을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자로 묘사합니다(요일5:16).
또 우상이라고 표현합니다(요일5:21).
촛대가 옮겨지면 성령과 단절되어 기름공급을 받지 못함으로 구원이 상실됩니다(계2:5).
진리를 바로 알면 자유합니다. 진리를 모르면 자유를 빼앗겨 악한 자의 종이 됩니다.
에베소 교회의 다수는 니골라 당을 미워했지만 그중 일부가 첫사랑을 버리고, 악한 자들을
따라갔습니다. 첫사랑과 처음 행위를 회복함은 오직 복음에 붙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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