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바울서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율법의 긍정과 부정

오은환 2024. 12. 28. 11:00

앞서 시편 119편을 통해 구약 성도들(유대인)에 대한 율법의 역할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시편 119편은 율법에 대한 찬가로 부정적인 부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 율법을 조명하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성도의 삶의 풍성함을

노래합니다.

 

시편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은 율법에 대해 늘 가까이하며 입술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하는
성도의 삶에 꼭 필요한 존재로 묘사합니다(수1:8). 

성육신하신 예수님 역시 그렇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생명"(구원, 영생 - 레18:5, 눅10:28, 롬10:5,

갈3:12)을 얻을 것이며,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며(마7:21), 성도들이 걸어야 할 '좁은 길'이라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마7:13, 눅13:24).

 

옛 언약 아래에 있는 구약 성경과 복음서가 율법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표현한 이유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이(이스라엘)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이미 거듭났고, 그 결과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할례언약). 율법은 이미 의롭게 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곧 성령 안에서 율법을 지킬 힘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바울 서신은 율법에 대해 매우 부정적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근원 자체는 선하고,

거룩하고, 의롭다고 평가하지만(롬7:12) 그것이 이방인에게는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단언합니다. 이 부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율법폐기론자가 됩니다. 

 

첫째, 바울은 율법의 예표들은(절기, 의식법, 할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에 그가 오심으로

더 이상 존속할 필요가 없음을 선언합니다. 할례는 세례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되었던 

의식법(음식법, 정결법, 절기, 제사)은 허물어졌다고 가르쳤습니다.

 

둘째, 이방인 성도들을 미혹했던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이방인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주 인용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할례보다 훨씬 이전에 의롭게 하는 요소이며, 

아브라함의 믿음이 결국 이방인들도 의롭게 되는 예표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셋째, 바울이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이방인 성도들이 믿음을 가지고 난 후, 자신의 이전

삶을 율법에 비교해 보니 율법은 자신들을 사망으로 끌고 가는 역할을 했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꼭 필요했구나 하는 관점에서 기술하기에 부정적입니다. 구약시대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해 찬가를 불렀던 것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나타난 율법의 긍정과 부정 -  

 

바울이 율법에 대한 긍정적 측면은 구약 성경과 복음서의 관점과 같습니다. 

모두 유대인 곧 구약 성도들이 의롭게 된 상태에서 율법을 행함과 동일한 관점입니다. 

반면 부정적인 측면은 이방인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자신의 과거를 율법에 비추어보는
관점입니다. 이것만 구별하면 율법에 대한 혼동은 사라집니다. 

 

다만 바울서신에서 혼란을 느끼는 부분은 '수사학' 분야입니다. 

당대의 현란한 수사학이 성경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특히 호칭에 관련하여 - 나, 너, 너희, 우리 - 무작정 읽으면 '나'는 바울 자신을 가르키며, 우리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모든 성도들'이라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 혼동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매우 강조하고 싶은 곳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호칭을 변경하기도 합니다. 

호칭 변경에 대해 매우 자유롭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나'는 복음을 듣고 돌아온 이방인 성도들이 자신이 복음 앞에서 결단해야 하는

상태, 곧 율법 앞에 섰을 때 사망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된 과거를, 심적으로는 영적 파산 상태

라는 것을 기록한 관점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함이라(갈2:19)" 

 

여기서 '나'는 바울 자신이 아니라, 이방인 교우들이 믿은 후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이런

처절한 상태에서 구원에 이르렀구나 하는 고백입니다. 

내가 곧 율법 앞에서 죽었다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살아났구나 하는 관점입니다. 

 

바울서신과 바울신학으로 인한 대 혼란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되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허비하다가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은 롬7:24절을 오해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매일 자책하며 사는 삶, 회개 후 찾아오는 자유를 망각한 삶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 

착각하며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