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을 보는 여러 관점들이 존재합니다.
조직신학적으로 보면, 우선 종말론의 관점으로 다루려고 합니다만 교회론과 신론 그리고
기독론과 성령론까지 언급되어 있기에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역시 "구원론"입니다.
종말에 어떤 사건들이 많이 나오느냐도 관심이 많지만 어떤 자들이 구원을 받는가는
제일 큰 흥미를 자아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성화를 엄청 강조합니다.
칭의 자체는 논의조차 하지 않게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유대인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다 칭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성화 없는 구원은 없다"
구약성경과 복음서 그리고 계시록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구원의 프레임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구원론과는 결이 많이 다릅니다.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예수님은 사데교회를 책망하면서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행위는 어떤 외적 행동이 아니라 그들 속에 믿는 형태를 언급합니다.
사데교회는 전도자들이 처음부터 전해준 복음이 아니라 이단의 영향을 받아 복음에서 멀리
떠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라 사데교회 일부가 그랬고, 또 부분적으로
떠나려고 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 기준을 제시하는데 처음에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라 합니다(계3:3).
마치 에베소교회를 책망한 방법과 동일합니다(계2:5).
예수님이 알고 있는 사데교회의 행위는 무엇일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당대에 교회를 힘들게 했던 <영지주의 이단>으로 보입니다.
계시록에는 언급이 안 되었지만 이그나티우스가 쓴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에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역시 영지주의 이단들과 싸웠던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모든 교회들이 영지주의 이단들로 인하여 복음에서 떠난 무리들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데교회의 일부가 복음을 멀리하고 영지주의 이단을 맛보는 행위는 <죽었다>라는 선언을받게 됩니다. 성화의 거룩함이 훼손당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무엇일까요?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입니다.
거듭난 자, 의인, 흰 옷을 입은 자, 온전한 행위를 가진 자라고 할 수 있고, 계시록에서는 종종 성도(계17:6, 18:20, 24, 19:8) 곧 거룩한 자라고 표현됩니다. 이런 영광스런 이름은 언제 받습니까?의롭게 되었을 때 곧 칭의가 일어났을 때 받습니다.
이러한 칭의가 성화의 과정 속에서 훼손을 당합니다. 단순하게 조금 훼손된 것이 아니라 근본까지 파괴되어 버립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죄인, 흰 옷을 더럽힌 자(계3:4), 부정한 자라는 이름이 따라 옵니다.
칭의가 절대로 훼손될 수 없다는 주장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성경 어느 곳이든 훼손된다는 것이 일관된 관점입니다.
"행위가 잘못되면(더럽혀지면) 죽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회개"라는 귀한 은혜의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선물입니다. 회개는 칭의가 아닌 성화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경고는 곧 성화의 과정을 이탈해서 돌아오지 않으면 구원이 아닌 심판의 대상이 됨을 경고한 것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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