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면 우리의 믿음이 결국 흔들리는 부실공사가 됩니다.
구약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도 피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구원도, 구속도, 거룩함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1. 창조의 목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지음을 받은 모든 만물에게 그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창조의 핵심은 인간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것이 핵심중의 핵심입니다.
먼저는 흙에 속한 형상으로 지었지만 하늘의 속한 형상으로 자녀 됨이 완성됩니다.
그 형태가 곧 주님이 부활한 모습과 동일합니다.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방법은 <구속과 거룩>입니다.
구속은 짐승의 피로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만> 가능합니다(롬5:9, 벧전1:18-19).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핵심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이것을 보지 못하고 곁가지만 봅니다.
2. 구속(대속, 속량)
구속이란 말은 값을 지불하고 샀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에게 구속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을 지불하고 죄 사함을 주었고,
그 결과 의롭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이나 구약 성도들이 짐승의 피로 구속을 받았기에
<그 의가 불완전하다고 주장>합니다.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구약에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제대로 선포하지 못합니다.
구약백성들이 의롭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뿐입니다.
동물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직 메시아가 오지 않았기에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내 준 것이 동물의 희생제사입니다.
1) 약속
창3:15절의 원시복음부터 구약에 이어져온 약속은 여러 가지 것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를 통하여 대속함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때때로 <약속들>이란 복수 형태로 말하는 것일까요?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뿐인데, 그것을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표징으로 주었습니다.
약속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로 이삭입니다.
어느 곳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바랄 수 없는 중에서 믿었다는 의미로 독자 이삭을 언급합니다.
사라의 생리가 끊어지고 아브라함 역시 기력이 없으므로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아들을 주실 것을
믿었기에 의롭게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메시아가 오시는데 그 외적 증표가 아브라함의 씨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도저히 잉태할 수 없지만 아들이 있어야만 메시아의 오심을 증거하기에, 이삭을 주실 것을 믿었다는 표현은
다른 말로 메시아의 도래를 믿었단 다른 표현법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 자손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하늘의 뭇별들처럼 많을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오심의 약속을 성취하는 외적 증표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사탄은 하만이나 기타 다른 악한 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지상에서 영원히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들이 제거하려는 이스라엘은 곧 메시아의 오심의 증표이기에 왜 사탄이 그랬는가 핵심을 보아야 합니다.
즉 구속사역이 이방인에게 퍼지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작품이었습니다.
셋째로 약속의 땅입니다.
왜 예루살렘, 이스라엘이 중요한지 다시금 생각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땅 한 평도 가지지 못했을 때 메시아의 약속의 증표로서 땅을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이스라엘, 구약 백성들은 메시아의 오심이란 약속을 예비하는 증표들이었습니다.
넷째로 여러 가지 약속들입니다.
메시아의 오심의 약속을 위해 하나님은 더 많은 표징들을 주었는데 그것이 약속들입니다.
할례, 율법, 안식일, 절기들, 성전(막)... 이런 모든 것들이 오실 메시아의 그림자들입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기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2) 율법
율법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논쟁이 많습니다.
율법은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에 어느 하나만 드러내서 논쟁하면 망신당하기 쉽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간단합니다.
율법 자체는 의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하나님의 선한 의도가 무엇인지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받은 자들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약속을 받은 것이 자신의 의가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 율법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시킵니다.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거기서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령의 조명아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심>이 진정한 목적입니다(갈3:23-24).
이 부분은 율법에 대한 칼빈의 견해가 가장 바르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이 가리키는 의에 대해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율법>에게서 증거를 받은 의라고 말합니다(롬3:21).
약속과 율법을 너무 대조하는 것은 바른 성경관이 아닙니다.
바울이 대조한 것은 율법 자체로 의를 찾으려는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을 향한
변증적인 차원에서 하신 것입니다.
약속은 딱 하나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율법은 그 약속을 받는 자들의 상태를 드러내주고, 결코 자신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약속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약속과 율법은 서로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잘 이해시켜 주는 도구들입니다.
3. 거룩 -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과 내주
구약에 등장하는 거룩은 성도가 곧 성령의 내주하는 성전 됨을 증거합니다(고후6:16, 약4:5, 출29:45-46).
무엇을 만지거나 만지지 않아서 거룩함에 이른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음식 자체를 먹거나 먹지 않아서 거룩함에 이른다는 주장들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무슨 일을, 어떤 것을 해야 거룩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거룩은 그렇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신약이나 구약 모두 거룩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한 의>를 받은 후,
<성령이 내주함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신약도 그렇지만 구약 역시 구속과 거룩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거룩은 하는데 구속은 없다든지, 구속은 있는데 거룩은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무가 좋은데 열매는 나쁘다든지, 반대로 나무는 나쁜데 열매는 좋다라든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못을 박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로워졌는데 그 결과 성령은 내주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의로워졌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성령이 내주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그렇다면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① ...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15:16)
② ...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살후2:13)
③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벧전1:2)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 입니다.
근원적으로 의로워졌고, 그 결과 성령이 내주했기에 거룩했습니다.
①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6, 벧전2:9)
② 너희는 내게 대하여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출22:31)
③ ... 회중이 다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민16:3)
④ 사람들이 너희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사62:12)
4. 사랑
예수님을 대적했던 자들도 사랑이 최고의 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사랑이 최고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불신자들도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로워졌더라도 거기서 끝나면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사랑의 힘은 전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주십니다.
신약도 그렇고(롬5:5), 구약도 동일합니다(신30:6).
구약에서 성령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하면 도망가고 싶어합니다.
① 어떻게 의로워졌습니까?
② 어떻게 거룩해졌습니까?
③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들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어야 진정한 성경 이해됨이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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