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 대한 이해는 곧 성경의 올바른 접근에 큰 도움을 제공합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라는 큰 틀이 존재합니다.
1. 하나님의 공의
울법의 조문을 통해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 자체가 나타나기에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됩니다.
* 또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그들과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그들에게 주시고(느9:13)
*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그러나 율법의 공의 앞에 죄인이 섰을 때 공존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죄가 하나님의 공의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인간은 먼저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율법 자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아름답지만 죄인에게는 곧 사망을 선고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은 약속을 받았던 이스라엘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율법을 통해서 본 약속의 자손들의 모습은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 나아가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약속을 받은 것이 결코 자신들의 의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한 것임을
율법을 통해서 보게 만듭니다.
그러면 여기서 율법의 역할은 끝나는 것일까요?
약속을 약속되게 하기 위해 율법이 해야 할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율법은 또 다른 의를 소개하며 인도하십니다.
2. 하나님의 사랑
*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
위 말씀은 여러가지 측면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율법 <외 - 코리스, 떨어져서, 떠나서, 따로이, 별개의, 외에는>에 또 하나의 의가 등장합니다.
그 의 역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의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의 죄를 사해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는 의입니다.
행한 일이 없이 값없이 죄사함을 받음으로 나타나는 의입니다.
율법은 이러한 두 가지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서 이런 두 가지 의를 모두 보아야만 혼동을 피할 수 있고,
사도들이 논쟁했던 서신서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공의를 통해 전달하는 의
율법을 통해 드러난 두 가지의 의가 각각의 문장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았으면 합니다.
죄인을 율법의 공의 앞에 세운 율법의 역할 묘사입니다.
*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7:10)
2)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다시 바라본 율법과 준수
예수님과 바울은 구약의 율법을 매우 긍정적으로 봅니다.
다만 바울이 율법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시점은 교회 내의 율법주의자들을 대적한 싸움에서 입니다.
여기서 주의 할 점은 예수님이나 바울이 율법 그 자체로 이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성령이 내주하심과 조명이 따르는 상황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 ...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느9:29)
*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18:5)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눅10:28)
이런 귀한 말씀들은 율법 자체를 지킴으로 나오는 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에 근거한 것임으로 곧 성령의 내주가 뒤따른 삶을 전제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이해할 때 대부분이 이런 관점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7)
언뜻보면 행위 구원을 말하지 않나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행위의 열매들이 어떻게 맺어지는지 그 전제를 잊어버리면 대 혼란에 빠집니다.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 결과 성령이 임하심으로 나오는 성령의 열매들(갈5:22-23)입니다.
*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요15:3)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을 율법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노모스-율법)이 없느니라(갈5:22-23)
이 구절은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들과는 너무도 다르게 묘사합니다.
3. 십자가와 율법
히브리서를 보면 로마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심한 핍박으로 큰 어려움에 처하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 합니다.
잘못 이해하면 다시 돌아가서 율법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섬기면 되지 않은가 하는 혼란이 일어납니다.
구약의 백성들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받은 의와 성령의 내주하심을 따라 율법을 지키며 살아간다면
예수님으로 인한 핍박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 행위를 배도로 보고,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밖는 나쁜 행위로 정죄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바라본 율법은 구약적 관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율법 자체에 내포된 의를 충족하기 위해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를 다 짊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의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내포된 두 가지 의를 모두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공의와 사랑>을 이루었고, 새 생명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언약 아래서 구속과 성령 내주함으로 율법의 조항들을 조명하면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글로서 표현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타난 최고의 사랑을 봄으로
사랑을 알고, 행하기에 충분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조문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을 글로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 표현력이 한계가 있고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비교하면 매우 미천하게 보입니다.
또한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한시적인 역할을 하기에 그 사명이 끝나면 사라져야 합니다.
아까워할 것이 아니라 박수를 치면서 보내 드려야 합니다.
율법이 가진 두 가지 의를 이해함으로 불필요한 논쟁에 빠지지 말고,
바른 복음을 이해하는 터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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