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에 대한 논란이 될 만한 구절이 있습니다.
*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고전15:29)
1. 죽은 자들은 누구인가?
여기서 죽은 자들이 영적으로 깊은 잠을 자는 사람인지, 아니면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인지
먼저 정리가 필요합니다.
결론은 간단하게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이미 죽었기에 다른 사람이 그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곳 고린도 전서 15장은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하는 곳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른 교리보다도 부활에 대해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헬라인들에게 부활의 교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입니다.
육체는 영혼을 가두고 있는 감옥이란 전통적인 사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부활을 전할 때 아덴(아테네)의 사람들은 떠나갔습니다.
*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행17:32)
2. 왜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으려 했는가?
여기서 죽은 자들이 누구인지 조금더 살펴 보았으면 합니다.
믿음을 가졌지만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인지, 아니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이교도적 전통속에서 세례와
유사한 것이 있는지 정확한 묘사가 없어서 알기 어렵습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구절은 바울이 날마다 죽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부활이 있기에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위험도 장차 올 소망 때문에 능히 감당한다는 말씀입니다(고전15:30).
30절이 바울이 부활을 믿기에 날마다 고난을 감당한다를 표현하기에,
앞 절 29절은 반대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일들을 하고 있음을 수사학적 표현으로 언급한 것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죽은 자의 부활 즉 의인이나 악인이나 부활 자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교회 내에 있었지만 영지주의 사상으로 돌아간 자들로 보입니다.
3. 바울의 세례관
바울은 죽은 자가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바울 역시 아니니아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 한 후 머뭇거리는 것을 아니니아는 세례를 통해 이전과 다른 사람인 것을
알려줍니다.
*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22:16)
바울에게 세례의식은 회심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죄 씻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기에 외적으로 행하는 의식입니다.
내면의 신앙고백을 외적으로 고백한 것이 세례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로부터 내려온 할례(마음의 할례와 외적 할례)와 유사합니다.
마음의 신앙고백이 수반된 신앙고백만이 유효합니다.
만일 그런 것이 없다면 할례는 무익합니다(갈6:15).
그러므로 바울은 먼저 복음을 통해 거듭남을 추구했습니다.
굳이 세례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나는 그리스보아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고전1:14)
4. 결론
그러므로 죽은 자를 위한 세례 문제는 실상 부활을 믿지 아니한 자들이 행한 무의미한 의식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적 의식을 도용해서 자신들의 상상의 나래를 펴곤했습니다.
만일 교회 공동체가 그런 무익한 행동을 했다면 바울이 용납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른 교훈으로 그런 교우들을 돌이켰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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