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전효성 목사님이 주장했던 두 증인 사역에 대해 몇 가지 염려가 됩니다.
1. 구약 선지들의 믿음과 행함의 근원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한 구약 선진들의 믿음에 대한 설정이 애매합니다.
대단한 믿음, 차원이 다른 믿음과 행동의 근원에 대해 신약과 동일함을 잊었습니다.
믿음과 행동의 근원은 성령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의 사도들 모두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놀라운 일을 행했습니다(골1:29).
2. 히브리서 11장 39-40절에 대한 오해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11:39-40)
구약 백성들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하심을 통해 죄사함이 이루어졌습니다.
모형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실체에 대한 약속을 확신시켰습니다.
만일 이런 약속이 있었지만 실체가 오지 않으면 그 효능이 있겠느냐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반드시 실체를 보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구요...
모형과 실체의 차이점은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 양과 실체이신 예수님의 차이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간단한 문제를 전효성 목사님은 크게 뛰어 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보아야 할 구절들을 사역자들로 바꾸었습니다.
구약의 선진들의 운명이 신약시대의 사람들의 수고에 달려 있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본문은 그런 의미가 전혀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또한 두 증인 사역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두 증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보낸 사역자들로 보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해석입니다.
물론 두 증인처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능력있게 행하며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증인 사역을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한다면 괴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두 증인처럼 그런 능력이 아무에게나 주어지겠습니까?
특별한 일을 위해 주신 능력들을 너는 왜 안하느냐고 짐을 지워야 할까요?
3. 두 증인(계11:1-13)
두 증인 사역에 대해 오해가 많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대로 행동합니다.
잘못 생각하면 잘못한대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두 증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보냈던 스룹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제사장처럼
두 명의 선지자입니다(계11:10).
두 증인은 적그리스도에게 죽임을 당하는 역사적 사실 속에 등장할 실제 인물입니다(계11:7).
두 증인이 사역할 때 이스라엘은 실제로 3년 6개월 동안 가뭄에 처합니다.
이런 일들은 상징이 결코 아닙니다(계11:6).
이들이 활동했던 장소는 이스라엘이며 예루살렘입니다.
거룩한 성(계11:2),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계11:8),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계11:8)으로 불린 이스라엘입니다.
두 증인 활동으로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됩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적 사실들을 상징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 ... 그 남은 자들은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계11:13)
더 깊은 내용은 아래의 글들을 참고 바랍니다.
* http://cafe.daum.net/aspire7/9z7T/2273 - 두 증인은 누구인가?
* http://cafe.daum.net/aspire7/9z7T/4119 - 두 증인은 교회가 아니다
* http://cafe.daum.net/aspire7/9z7T/12880 - 두 증인에 대한 상징적 해석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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