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루지 않은 문제를 꺼냅니다.
세례 요한을 태중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자로 묘사합니다.
*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1:15)
화란의 정치가이자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는 매우 특이한 해석을 합니다.
세례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함을 받은 것을 중생이라 주장합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모태에서부터 중생되었던 것처럼 전적으로 신적 동작으로 되는 일이다"
(신학지남, 2013년 겨울호, p.140)
카이퍼가 세례요한의 모태 중생설을 주장한 것은 성령 충만에서 찾은 듯 합니다.
눅1:15절 본문을 자세하게 보면 세례 요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실인으로 지정한 사람들,
특별히 구약의 사무엘이나 삼손 같은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았을까 추정됩니다.
중요한 것은 눅1:15절의 세례 요한이 어머니 태중에서 중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믿는 부모의 유아들의 중생 문제와도 직결되기에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성경에 능통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나누었던 대화를 참고해야 합니다.
사실 니고데모는 개인적으로 왔지만 예수님은 그와 같은 모든 사상을 가진 학자들을 꾸짖기 때문입니다(요3:11).
그가 책망받은 것은 성경을 많이 읽었지만 중요한 중생을 전혀 알지 못한 이유입니다.
할례를 받으면서 그것이 주는 유익을 모른 것과 같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즉 중생해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또한 들어갈 수 있습니다(요3:3,5).
이런 어려운 주제인 하나님 나라를 알고 깨달을 수 있는 나이는 언제쯤일까요?
미궁으로 빠질 수 있지만 예수님은 간단하게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 예수께서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8:16,17)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갑니다.
중생 즉 새로 태어나는 것은 여러 번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한 번 태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태중에서 중생했다면 또 다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을까요?
그도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눅1:59).
세례 요한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충만함은 나실인으로서 보호하시는 특별한 섭리로
봐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태중에서 중생했다로 보는 것은 조금 과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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