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시록(1-22장)

2장 일곱 교회 -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

오은환 2013. 10. 28. 17:11

 

                              일곱 교회 -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는 일정한 틀이 존재한다.

  편지의 서두에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난다(1:13-20).

  각 교회들의 현재적인 형편과 고난들을 마치 현장에 있는 성도들처럼 보고 있으며, 성도와

   한 몸으로서 그 고통을 느끼고 있다.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4-5)

 

  교회들은 수고한 일에 칭찬을 받고, 진리를 벗어난 일들은 엄한 책망을 받는다.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교회가 다 이기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급을 여러 모양으로 표현하고, 주님의 재림 때 받게 하신다.

  그 상급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에서 누리게 될 복들이다.

 

1. 에베소 교회(2:1-7)

 

 1) 인사와 칭찬(1-3)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모습은,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 됨을

  의미한다(1:12, 13, 20).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5:23). 그의 오른 손으로 교회가 강탈당하지 않도록 꼭 잡고

  계신다.

  -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10:28)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모든 상황을 잘 알고 계신다.

  여기서 알다 헬라어 오이다, 신적 통찰력을 가지고,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심을

   의미한다.

  에베소 교회의 행위, 수고, 인내,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영적분별력을 칭찬 하신다.

 

 2) 책망과 회개 촉구 - 잃어버린 처음 사랑

  에베소 교회는 여러 가지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 받는다.

  회개를 통한 회복이 일어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길 것이라고, 엄중 경고한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 상실을 의미하며, 촛대에 기름을 공급하는, 성령의 임재를

   거두겠다는  의미이다(4:11,12).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가 이런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는가?

 

  (1) 교회에 대한 단수복수 이해

   교회에 대한 대명사로서, ‘라는 단수와, ‘너희들이라는 복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될 때

   바른 해석에 접근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단수와 복수를 자유롭게 사용하신다.

  예수님은 성도 각 개인과 공동체로서 교회가 하나라는 지칭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

   하신다. 교회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릇된 문제에 대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는 성도들이 공존한다. 일곱 교회 공히 이런 접근이 필요하다.

 

   에베소 교회를 단수로 표현하고 있다. 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마치 하나처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나머지 다른 부류보다 더욱 잘한다는 칭찬을 받는다(6).

  서머나 교회도라는 단수로 교회 전체를 지시하면서, 중간에 너희 가운데란 복수를 사용

   하기도 한다(10). 버가모 교회 역시 단수로 시작했다가 복수로 전환하고 있다.

 

  두아디라 교회 역시 그렇고, 세밀하게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 알려주신다.

  특별히 교회 내에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도, 굳게 지킨 자들은

  위로하였다(24).

   사데 교회는 단수로 시작한다. 마치 모든 교회가 죽은 것처럼 말한다(3:1-2).

  그러나 아직 이곳에 흰 옷 입은 자들이 있음을 이야기 한다(3:4-5).

  계시록 3:1-2절로 사데 교회 이야기가 끝났다면, 교우들 모두가 심판 받은 교회로 잘 못 인식될

   수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매우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교회 전체가 완전히 죽어버린 공동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 교회들을 살펴보면서 이런 잘못된 관점들을 바꾸어야 한다.

  예수님은 잘못된 사람들을 바로 잡아, 모두 회복되길 원하는 관점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설령 대부분이 영적 깊은 잠을 잘지라도, 소수의 사람들은 처음 사랑을 가지고 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복을 주신다(3:20).

 

   교회를 종종 단수로서 이야기하지만, 주님이 오시는 때는 이기는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로

   나눠진다. 각 교회들의 마지막은 항상 이기는 자들에게 상급을 주신다.

  처음 사랑을 지킨 자들은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상급을 받는다.

  교회는 이기는 자가 있는 반면에 패배하는 자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13:49-50)

 

   교회에 대하여 예수님은 단수와 복수를,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바울 사도 역시 교회가 하나이면서 다양한 지체들이 존재함을 이야기 한다.

  -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 12:12)

 

전 체 교회속의 두 집단 ( 전체가 아니며 분리됨 )
지역교회 책망받는 집단(회개하지 않으면
버림받는 자
)
칭찬받는 집단(이기는 자들)
에베소            처음 사랑을 버린 자,
      = 니골라 당의 교훈에 물든 자
            처음 사랑을 지키는 자
      =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자
서머나              환난 가운데서 충성하는 자
버가모 *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14)
  *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15)
   * 예수님의 검에 심판 받을 자들(16)
          이런 악한 교훈들을 이기는 자
두아디라    * 이세벨을 용납한 자(20)
   * 그와 더불어 간음한 자들(22),
자녀(23),

   *  각 사람의 행위대로 형벌 받음(23)
   *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이해해야 한다
      -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20)
           이세벨의 교훈을 이긴 자
       =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한 너희(24)
사데  살았다하나 죽은 자(3:1)
   = 옷을 더럽힌 자(3:4)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3:4)
 = 그들은 흰 옷을 입기에 합당한 자들
(3:4)
빌라델비아         집합적으로 이기는 자 언급하며,
  개별적으로 선한 싸움 싸우라 부탁
  (3:11)
라오디게아    주의 음성을 듣지 못한 자(3:20)
  - 벌거벗은 자(3:17)
  - 벌거벗어 버림받은 자들(고후 5:3)
 주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3:20)

 

2) 잃어버린 처음 사랑

   처음 사랑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알고 주인 삼은 성도들이, 그 사랑을 변함없이 간직하는 것을 처음 사랑으로 정의할 수

  있다. 속량함을 받은 성도들(14:3,4)의 정체성을 이렇게 증거한다.

- 이 사람들은(144)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

   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14:4-5)

 

   성도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8:23, 1:18)이며, 그 신앙의 변절 없이 끝까지 예수님을

   주인삼고  나가는 것을 처음 사랑이라고 계시록은 일관성 있게 표현한다.

   음녀나 적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 성도의 행실을 처음사랑이라 한다.

   ‘처음 사랑을 다른 말로 처음 행위라 한다(5).

   예수님만을 신랑으로 모시는 삶을 저버리는 행위에 대해, 음녀에게 돌아간 자로 표현한다.

 

   일곱 교회를 살펴보면 처음 사랑을 잃게 하는 요소들이 각 교회마다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처음 사랑을 포기하고 음녀에게 돌아갔다.

   영지주의 분파로 맹위를 떨치던 니골라 당의 악한 교훈이, 바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음녀의

    역할을 했다.

   처음 사랑은 단순하게 신앙의 감정적 상태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역경 속에서도 신앙의 본질적인 진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 처음 사랑이다.

 

   서머나 지역이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빌립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지주의자들의 악한

    교훈을 경고하면서, <처음 복음>으로 돌아오라 명령한다.

   “그러므로 대중들의 가치 없는 사색을 뒤에 버려두고, 처음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말씀으로 

     돌아섭시다(속사도 교부들, J.B 라이트푸트, M.W 홀메스 공저, 이은선 역. p.175)

   처음사랑의 상실은 신앙의 배교를 의미한다. 성령을 받은 자들이 고의로 진리를 배반하는 행위로

  ‘성령 훼방죄이다(12:31). 영지주의의 악한 교리들은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무효화 시키고,

   성부 하나님을 조롱했으며, 성경에 대한 권위를 한없이 추락시켰다.

 

   계 2:1-7절의 본문 구성은 이렇다.

   1-3절은 칭찬이며, 4-6절은 니골라 당에 대한 교회 내의 두 가지 반응을 기록한다.

   4-5절은 니골라 당의 악한 교훈을 받은 자들을 책망한다.

   6절은 이런 악한 교훈과 맞서 싸운 자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이다.

   6절 서두에 나오는 오직 헬라어로 알라이다.

    오직이란 말보다 그러나로 해석하는 것이 오해의 여지가 없다(2:4, 14, 20, 3:4).

 

   에베소 교회 교우 가운데 일부가 처음 사랑을 잃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니골라 당의 유혹

   이다(6). 교우들 중 일부는 니골라 당의 교훈에 대해 철저하게 싸웠다.

   이런 모습을 예수님도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라고 칭찬한다.

  예수님 또한 이런 교훈을 미워하셨다(2:6).

 

  버가모나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미워한다는 표현을 넘어, 엄중하게 심판하겠다는 말로 감정의

  수위를 높인다(2:16, 22, 23).

  반면에 에베소 교우들 중 일부가 니골라 당의 교훈에 빠져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

 에베소 교회가 열심히 싸웠지만, 미혹을 받은 일부가 악한 교훈을 용납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영지주의의 악한 교훈은 에베소 교회에 악성 종기처럼 깊숙이 파고 들어왔기에, 매우 힘든 싸움

  이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에베소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지주의의 한 분파인 니골라 당의 교훈에

  미혹된 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 안에 회개에 대한 소망이 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기도하고, 그들의 분노에 

    대해 온유하고, 겸손하도록 당부한다. 더 나아가서, 그들을 향해 복수하지 말도록 부탁한다.

    또한 그들을 <마귀의 어떤 잡초>라고 표현한다”(속사도 교부들, 라이트 푸트, 하머 공저,

    이은선 역, p.122)

 

  3) 니골라 당의 악한 교훈(2:6,15,20)

  니골라 당의 악한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속사도나 교부들의 책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마지막으로 언급된(6:5) 니골라가 이단 영지주의로 빠졌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니골라 역시 첫 사랑을 잃어버렸다.

 

 계시록보다 약 10 년 후에 기록된 이그나티우스의 편지에, 에베소 교회가 영지주의자들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교회사가 유세비우스 역시

  니골라가 초대교회 일곱 집사중 한 사람이라 증거한다.

 니골라 당의 가르침은 발람의 악한 행위와 더불어, 음녀 이세벨의 교훈과 유사하다(2:14, 20).

 발람은 발락 왕에게 이스라엘을 음행으로 타락시킬 수 있음을 언질 해 주었다.

 이스라엘은 악한 발람의 계략에 빠져 이방신의 제사에 참여하고, 그곳에서 음행을 행했으며,

  처음 사랑을 버렸다(25:1-3).

  니골라 당의 악한 교훈 역시 성도들을 미혹하여 음행에 빠지게 하고, 결국 처음 사랑을 버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니골라 당의 행위는 계시록 17-18장의 음녀의 모습과 유사하다.

  음녀의 달콤한 사상에 미혹된 자는 누구든지, 음녀와 운명을 같이 한다.

  성도는 음행에 발을 담가서도, 그 유혹의 잔을 마셔서도 안 된다.

  그 잔에 미혹된 자는 취하게 되고, 신앙에서 넘어지며, 결국 버림받은 자가 된다.

 

 4)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2:7)

  예수님은 각 교회들에게 이기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신다. 복음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성도에게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왕이시며, 그러한 고백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야 한다.

  이런 성도가 이기는 자이다.

  성도는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17:14)

 

  에베소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주는 상급은 모든 교회의 이기는 자들이 받는 것과 동일하다.

  어느 한 교회에만 주어지는 복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동일하게 받는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7)라는 말씀 속에, 단수가 아닌

    복수가 사용되고 있다.

  이기는 자에게,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주신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하나님의 낙원이다. 이곳은 어디인가?

  ‘새 예루살렘 성의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다(22:2).

  바울 사도는 자신이 낙원에 갔던 이야기를 한다(고후 12:4).

  그 낙원을 또 다른 말로 셋째 하늘이라 표현했다(고후12:2). 모두 같은 의미이다.

  낙원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오직, 그곳에만 있기 때문이다(12:22-24).

 

  결국 이기는 자에게 낙원(새 예루살렘 성), 즉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들어가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며, 복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성도의 이 땅에서 삶은 많은 고난이 뒤따른다.

  사탄의 핍박으로, 주리고 목마르며, 보호막이 없는 환경에서 상함을 입게 된다.

 

  그러나 낙원에서는 더 이상 고통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풍성함이 기다리고 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생명나무 열매를, 이기는 자가 되어서 다시

   먹게 되는 복을 누려야 한다(잠11:30)

 

2. 서머나 교회(2:8-11)

 

 1) 인사와 칭찬(2:8-9)

  예수님은 사람이셨지만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처럼(1:8), 예수님은 자신이처음이며 마지막이란 말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2:8).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세상의 죄와 고난을 짊어지고 죽었다가 부활하였다.

 

  서머나 교회 역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을 받을 것을 암시한다.

  서머나 교회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고난 받을 것을 예시한다.

  물론 그 고난은 서머나 교회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동일하게 당한다(9:23-24).

 

  예수님은 교회가 직면한 상황을 잘 알고 계신다.

  가시적으로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을 통해 엄청난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가운데 바울과 선교팀이 유대인들로 인하여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은 것처럼,

  서머나 교회 역시 그런 종류의 핍박을 경험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박해는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의 순교 때 정점에 도달한다.      

  유대인들은 폴리캅을 죽이기 위해 특별한 열심을 가진 자였고,

   순교한 그의 몸을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악한 자들 이었다(속사도 교부들, p.193-195).

-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살전 2:15,16)

 

  유대인들을 선동하고 조정하는 실체는 사탄이다.

  서머나 교회는 사탄이 주는 환난과 궁핍이라는 힘든 시련을 잘 이겨내고 있었다.

  환난의 실체가 바로 궁핍으로 나타났다.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성도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자들에게 매매를 금지하여 성도의 신앙을 시험한다(13:17).

  신앙의 순결 때문에 받는 서머나 교회의 시험은, 장차 모든 교회들이 받을, 고난을 예표한다.

 

  특별히 서머나 교회는 영지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이그나티우스의 순교 편지(AD 110년경)에는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 역시 영지주의와 치열

  하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AD 96년경),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영지주의와의 싸움에서 대체로

  만족할 만한 결과들을 얻은 것 같다.

 

 2) 장차 받을 고난

  칭찬 받은 교회로서 서머나 교회는 어떤 혜택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시험의 때를 면해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3:10).

  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가,사탄의 시험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계시록 3:11절에 곧바로,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말씀하신다. 이것은 사탄의 핍박에서 이기라는 격려이다.

 

  서머나 교회 역시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사람들 즉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내리는 심판 재앙에서 보호 받는다.

 

(1) 시험의 주체 - 사탄,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음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재앙은 하나님의 선한 천사들를 통해 오직 악인들에게만 임한다.

  이것은 현재에도 그렇고 마지막 때에도 동일하다.

  진노의 심판 재앙을 실행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 대상은 악인들이다.

 

  또한 사탄이 행하는 핍박의 대상은 오직 성도뿐이다. 결코 자신의 편인 악인들이 아니다.

  이 두가지 원리를 항상 유념하여 해석해야 한다.

  사탄은 성도의 구원을 방해하려고 많은 전략들을 실행하고 있다.

  사탄 자신도 행하지만, 주로 사람들을 이용해서 악한 뜻을 성취하려 한다.

  -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10)

 

   이 말은 종말론적으로 볼 때, 많은 성도들이 마귀의 핍박으로 인해 순교할 것을 암시한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거나,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임을 당하게

   된다(13:15). 그 수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순교자의 수가 채워질 때, 그 때가 바로 주님이 오시는 시간이다(6:11).

  

(2) 성도의 고난

   성도의 고난은 순교나 그와 유사한 큰 환난이다(17:3).

 그들이 고난 받는 이유는 빛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은 것처럼, 그를 따르는 성도들 역시 미움을 받는다(15:8).

 

 고난의 기간이 얼마나 되는가? 하나님께서 큰 환난의 날들을 감하셨다(24:22)

  좀 더 구체적으로 그 고난의 날을 십 일이라 하신다.

 문자적 십 일인가? 아니면 상징적인 날 수 인가?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도가 받는 고난의 기간을, 십 일이라고 표현한다.

 

 10이라는 숫자는 의인이 악인에게 고난당하는 일정한 기간을 의미하며,

 ‘결코 짧지 않고, 계획된 모든 시간이다(19:3, 12:11, 12, 4:12).

-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열 번이나 변경 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31:7)

-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14:22)

 

  (3) 격려하시는 예수님(10)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전부라면 성도는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다(고전 15:19).

  하지만 성도는 장차 올 세상을 유업으로 받아 영생을 누리기에 그런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고난은 일시적이며성도를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시킨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난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도구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다.

  성도는 오직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고난 뒤에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

  영광스런 약속을 바라보며, 성도들은 소망을 따라,고난에 대처해야 한다.

  시험당할 때,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감당할 힘을 주신다(10:18-20).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12)

 

 3)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2:11)

  서머나 교회의 이기는 자들이 받는 상급은 매우 독특하다.

 위로의 말씀이나 풍성한 선물이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둘째 사망(불못)의 해를,받지 않는다(20:14, 15).

 

  이 말씀은 여러 각도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적 고난 뒤에는, 더 이상의 어떤 어려움도 남아 있지 않는다.

  또한 성도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 자들로서, 주님의 재림 때에 부활하여 천년동안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 하는 권세를 받는다(20:6).

  이러한 상급은 고난 속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영원한 즐거움으로 초대하는 기쁜 소식이다.

  서머나 교회가 받을 상급은 결국 다른 교회의 이기는 자들이 받는 것과 동일하다.

 

 4)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17)

  일곱 교회 편지의 마지막은 항상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한다(13:43).

  교회는 독자적인 힘이 아니라 령과 연합으로 존재한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어 그의 몸 된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5:23).

-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에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0:28)

   

3. 버가모 교회(2:12-17)

 

1) 인사와 칭찬(2:12-13)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예수님이 표지로 등장한다.

 버가모 교회의 문제들을 예리한 검으로 해결하신다.

 날선 검은 진리를 저 버리고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을 향하고 있다.

 회개하지 않는 완악한 자들에게 날선 검으로 싸울 것을 경고한다(2:16).

 

 또한 날선 검은 재림 때 짐승과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어 성도들을 핍박했던 세상의 수많은 악한

  무리들을 겨누고 있다(19:20).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은 성도들을 보호하고, 불경건한 자들과 악인들을 진노로 심판하는

  도구이다.

 특히 성도들의 무리 가운데 섞여 있지만 여전히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거나, 환난 때에 주님을

  배교하는 자들 곧 진리를 멸시하는 불경건한 자들을 심판하는데 사용된다(4:12).

 

  버가모 지역을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으로 언급했다.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바로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 핍박은 안디바 뿐만 아니라 버가모 지역 교회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났다.

 교회는 그 핍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처음 사랑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님의 칭찬은 장차 받을 상급의 보증이다.

 

 2) 책망과 회개 촉구(2:14-16)

  각 교회가 책망받은 말씀들은 단순히 일시적인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의 근본적인 위협을 주는 것들로부터 회개하고, 회복하라는 책망이다.

  이것은 일종의 처음 사랑을 잃게 하는 매우 치명적인 오염이다.

 

  에베소 교회에서 다루듯이, 처음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왕으로 고백하고 주인으로

  섬기는 신앙이다. 처음사랑이 무너지면 더 이상 성도가 아니다.

  마치 성도의 모양은 있지만 성도가 아닌 것과 같다(3:1).

  사람은 이런 모습을 구분할 수 없지만,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은 능히 구분하시고,

  그들을 뜨거운 풀무 불에 던지신다(13:42, 50; 1:14).

  

(1)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14)

    발람의 이야기는 민수기 22장부터 25장까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 교묘함을 드러내고 있다.

  선지자 발람은 모압 왕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물리칠 계략을 알려 주었다.

  전쟁이나 무력이 아닌 이스라엘을 이방신의 축제에 초대하여 미혹 당하게 했다.

  미혹된 이스라엘의 일부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며 이방신을 섬겼다(25:1-3).

  이렇게 첫 사랑을 상실한 자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구약교회를 오염시켰다.

 

   이 사건은 단순히 이스라엘에게만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후대의 모든 교회들에게도 거울이

  된다. 버가모 교회가 현재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버가모 교회 전체가 이런 교훈에 빠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발람의 교훈에 빠져 오염된 자들을 책망하는 것이다(15).

 

   우리는 교회가 한 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 지체가 아파하면 나머지 모든 지체가 같은 고통을 당한다.

   반대로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즐거워한다.

   그래서 교회 전체에게 책망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혹된 각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진노를

     표현하기도 한다.

-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6)

 

  (2) 니골라 당의 교훈(15)

   니골라 당의 교훈에 대한 이야기는 에베소 교회에서 이미 다루었다.

   버가모 교회에서는 니골라 당을 발람의 교훈과 같이 다루고 있다.

   본질적인 면에서나 외형적인 측면에서 두 교훈은 매우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발람의 교훈은 후대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악한 교훈들의 거울이 되었다.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AD 96 년경), 영지주의의 한 분파였던 니골라 당의 교훈은 소아시아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각 교회들이 들은 책망 가운데 니골라 당의 교훈과 유사한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

  에베소와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뿐만 아니라 사데와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유사한 위기에 노출된

   것처럼 보인다.

  속사도들의 편지를 통해 볼 때,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모두 영지주의의 미혹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회개의 촉구(16)

   만일 이들이 이런 책망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진노의 심판만이 남았음을 경고한다.

  예수께서 속히 가겠다고 했다. 여기서 속히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을 언급한다.

  마치 도둑처럼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3:3), 해산한 여인에게 산기가 임한 것처럼(살전 5:3),

  심판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주님이 오신 후에는 더 이상 회개할 시간이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권세도 있고, 악인들을 심판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개인적인 종말의 때와 모든 민족에게 임하는 재림의 때에, 그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수많은

   대적자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19:15, 21)

 

 3)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

  이기는 자에게 주는 상급은 무엇인가?

  바로 감추어진 만나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이다.

  여기에는 구속사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1) 감추었던 만나(17)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으로, 영원히 죽지 않게 하는 만나라고 했다

  (6:48-51).

  이 떡을 먹어야만 죽지 아니하고 영생함을 얻는다. 이 떡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14:6).

  구원을 베풀 다른 이름이나 다른 길은 없다(4:12, 14:6).

 

   그런데 여기서 감추었던만나라고 일컫는다. 왜 감추었다고 했을까?

   모세를 따랐던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임한 만나가, 장차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감추었던 만나는 에덴동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생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생명나무이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인간은 영생하도록 지음 받았음을 알 수 있다(3:22).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나무는 감추어져 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 생명나무로의 접근은 원천봉쇄 되었다.

  천사들을 통해서 접근하는 길을 완전히 차단했기 때문이다(3:24).

  그런데 이 감추었던 만나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곳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예수님이 다스리는 새 예루살렘 성이다.

  성도들은 그곳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다시 먹게 된다(22:1,2).

 

   결국 감추어진 만나는 이기는 자들에게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권세를 부여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급은 주님이 재림한 후 새 예루살렘 성에서 주신다.

  생명수 샘물(21:6)이나 생명나무의 실과(22:2)를 먹는 자는 영생한다는 개념으로도

  이해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서 먹고 마신다는 개념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2) 흰 돌

   고대 연회장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허락의 표로서 흰 돌이 사용되었다.

  즉 예수님과의 혼인잔치 자리에 참여하게 되는 증표로서, 행복을 누리게 되는 담보물이 된다.

  새 이름이(65:15, 62:5) 기록된 흰 돌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초대하는 혼인잔치에 확실히

  참석함을 보증해 준다.

 

4. 두아디라 교회(2:18-29)

 

 1) 인사와 칭찬(18-19)

  두아디라 교회 서두에 나타난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을 가지셨다.

 그 눈은 만물의 중심을 꿰뚫어 보신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중심을 보신다.

 모든 교회는 예수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는 줄 알아야 한다(23).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한다.

 

  또한 빛난 주석의 발을 가진 자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타난 발은 심판자로서의 위용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악인들을 향한 심판으로 진노의 포도주의 틀을 밟겠다고 했다(14:20, 19:15).

-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냐,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63:2-3)

 

  편지 서두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두아디라 교회에서 음행의 교훈을 받아들인 자들을 알고 있으며,

 그들을 진노의 발로 밟을 것임을 암시한다.

 편지를 읽는 순간 그 얼굴빛이 변하고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를 잘 알고 계신다.

 교회가 행하는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에 대한 칭찬이 따라온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는 칭찬은(19) 신앙이 잘 자라고 있음을 보여준다(3:10).

 

 2) 책망과 회개 촉구(20-24)

  소아시아 지역의 많은 교회들이 당시 들불처럼 번지던 영지주의의 악한 교훈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한 사상을 교회가 용납함으로서 성도들의 일부가 미혹을 받기 시작했다.

 두아디라 교회도 에베소, 버가모 교회처럼 니골라 당의 악한 교훈에 성도들의 일부가 오염되었다.

 본문의 정황상 다른 지역의 교회들보다 더 많은 성도들이 오염된 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사건에 세 번이나 심판하겠다는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1)이세벨의 교훈(20-23)

   시돈 왕의 공주로서 북이스라엘 아합 왕과 정략결혼을 했던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파괴하는

   악한 왕비가 되었다. 그의 등극으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였다(왕상 18:13).

  이스라엘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바알과 아세라 숭배로 대처 되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음녀의 이름은 이세벨이다.

   -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왕하 9:22)

   -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리라(왕하 9:7)

 

   여기서 이세벨이 실제적인 이름인지, 아니면 악한 선지자 발람처럼 구약의 대표적인 음녀로서 이름을

   사용한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은 발람처럼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경배하게 하는 악한 교훈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이런 영지주의를 사탄의 교훈’(24)이라 했고, 이그나티우스는 마귀의 잡초’, 폴리캅은

  ‘사탄의 맏아들’, 이레니우스는 사탄의 설교라고 했다.

 

   이세벨은 당시에 만연하던 영지주의의 교훈을 가지고 두아디라 교회를 오염시켰다.

  에베소 교회에 나타난 자칭 사도라 하는 자, 이세벨처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자들은 영지주의자들로서,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영지 신령한 지식 를 가진 자라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이들은 성경의 말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받았거나 깨달았다고 하는 신령한 지식들을

   성경의 권위 위에 놓았다.

  스스로를 사도, 선지자로 칭할 수 있었고, 자신들은 그 누구로부터도 더 이상 배우기를 거부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이런 자들을 말씀 밖으로 넘어간 자라고 했다(고전4:6).

  이런 자들의 주장 자체를 교회 안에서 다루지 말라고 엄히 명령했다(딤후 2:14-18).

 

  베드로 사도 역시 영지주의자들을 악한 천사들보다도 더 심하게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로

  (벧후 2:10,11),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라고 말한다(벧후 2:15).

  성경은 때때로 같은 사건 영지주의, 니골라당 - 을 이야기 할 때, 다양한 각도로 전개해 나가기에

  반복되는 이름에 대해 생략하곤 한다.

 

  성도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악한 사탄의 계략에 빠져들어 간다.

 성도는 행음케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리에 동참해서도 안 된다(고전 10:19-21).

 성도들이 우상에 대한 지식을 가졌기에(고전 8:1), 따라서 그러한 식사에 참석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성도로서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시험적인 식사가 때때로 방탕과 방종으로 이르게 하고, 신앙을 파탄으로 이끌며

 (25:1-5),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넘어지게 함을 경고한다(고전 8:9-13).

 

  (2) 빛난 주석과 같은 위엄의 발로 심판

   예수님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과 같다(2:18).

  위엄의 발로 악인들을 포도주 틀을 밟듯이 짓누른다(14:20, 19:15, 63:2-6).

  무시무시한 심판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뿐만 아니라,교회 내의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

  악한 교훈에  미혹되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일에 대하여 미리 경고하였다.

-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어디에 서리요(벧전 5:17-18)

 

  (3) 세 번에 걸친 엄중한 경고(21-23)

   두아디라 교회가 직면한 상황은 상당히 심각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세벨의 교훈에 미혹되었고, 그 세력이 계속해서 확산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이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회개의 기회를 우습게 생각하고 저버린다면 엄청난 심판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7:12)

 

   악한 교훈으로 죄악의 씨를 뿌린 이세벨을 침상에 던진다.

  또 이세벨과 함께 간음했던 자들 즉 그 교훈에 빠져 있는 지도자들 역시 큰 환난에 던진다.

  그리고 그 교훈에 오염되어진 무리들 역시 사망으로 던져짐을 경고한다.

  이런 사상에 오염된 자들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중한 심판은 회개를 촉구하는 긍휼이 담겨져 있다.

   -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5:14)

 

   여기서 침상이나 큰 환난, 사망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그 벌의 경중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심판에 직면하며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아무리 숨겨도 감출 수 없다.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의 중심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23).

  예수님은 은밀한 음행까지 다 알고 계시며, 그 행위대로 갚아 주신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일들에 대하여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고, 각 사람이 자기 행위를 직접 고백하게

  된다고 말한다(14:10-12).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4) 이세벨의 교훈에 미혹되지 않은 성도들에 대하여(24-25)

  두아디라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이세벨의 악한 교훈에 미혹되었지만, 여전히 믿음을 굳건하게 지키는

  자들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교회 내의 가장 큰 문제가 이세벨의 악한 교훈으로 인한 혼란이다.

  그렇지만 모든 교우들이 다 미혹되지 않았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다른 소아시아 교회들 역시 두 부류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혹독한 심판이 임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이세벨의 교훈은 사탄의 깊은 계략임을 말하면서(24), 정절을 지킨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고, 여러 가지

  유혹으로부터 진리를 굳게 붙잡고 있으라고 당부한다(25). 이러한 당부는 빌라델비아 교회에도 동일

  하게 전달되었다(3:11). 성도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많은 환난을 받을 것임을 암시한다.

-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14:22)

 

 3)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26-29)

  이기는 자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기는 자는 또 다른 말로 예수님의 일을 끝까지 지키는 자들이다(26).

  처음 사랑을 어떤 어려움에도 끝까지 간직한 자들이 곧 이기는 자들이다.

 

  (1)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26-27)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과 함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진다.

  이러한 통치 형태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통치 성격과는 많이 다르다.

  그 때에는 철장을 가지고 악인들을 다스린다.

  마치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은 통치처럼, 성도들도 예수님과 함께 이런 유형으로 다스린다.

  이러한 개념은 천년동안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통치)한다는 말과 같다(20:6).

  철장으로 다스린다는 말씀을 성경 여러 곳에서 증언하고 있다(27, 12:5, 19:15; 2:9;

  사 30:14).

 

   여기서 우리는 질문들을 해야 한다. 재림 후에 예수님과 성도들은 누구를 철장으로 다스린단

   말인가?

  죽은 악인들을 부활시켜 다스리는 것인가? 아니면 음부(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다스린단

   말인가? 여기에 대해 계시록 20장은 적절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 때 애곡하며 지켜보던 악인들의 목숨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되면 천년왕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다음의 구절들은 재림 때에 죽지 않고 살아서 고난당할 악인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 그 남은 짐승들은 그의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7:12)

-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이게 되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24:21-22)

-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2) 새벽 별(28)

   이기는 자는 새벽 별을 상급으로 받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표현한다

  (22:16). 별은 어두운 하늘에서 더욱더 밝게 빛난다.

   새벽이 다가오면 별들의 존재는 희미하게 변한다.

  모든 별들이 자취를 감추려 하는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선명하게 비취는 광명한존재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이기는 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광명한 존재가 된다.

  때때로 별이 아닌 해처럼 밝은 존재가 될 것을 언급하기도 한다.

-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24:17)

-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1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