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번역하면서 문자적인 통일성을 추구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특정 교단은 특정 단어를 목숨걸고 사수하려 합니다.
그래서 몇몇 단어들을 자신들만의 성경책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야훼, 침례...
여호와로 읽지 않고 야훼로, 세례로 읽지 않고 침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토론하다보면 침례라는 방식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침례만이 유일한 의식이 될까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어떻게 볼까요?
성경 대요리문답 161번을 참고해 보십시요.
"성례가 구원의 유효한 방편이 되는 것은 그것들 <자체 안에> 있는 어떤 능력이라든지
혹은 그것들을 거행하는 자의 경건이나 의도에서 나오는 어떤 효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다만 성령의 역사와 그것을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복 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크게 두 가지 현상이 영향을 주지 못함을 강조합니다.
첫째는 성례 자체(세례나 성찬)가 어떤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자가 복음을 받았는데도 사정으로 인하여 세례나 성찬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구원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들, 예를 들어 육지(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성도 - 우주 비행사, 선원,
감옥 수감자 -들은 비록 성례가 없다하더라도 그들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둘째는 성례를 행하는 자의 상태에 의해 성례가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신사참배를 행했던 목회자가 베풀었던 세례나 성찬이 무효되지 않음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도나투스 논쟁 같은 경우 교회는 배교한 목회자들이 준 세례가 유효함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매우 적절한 성경해석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단이 준 성례가 유효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단인 상태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세례의 방식을 가지고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세례나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의 믿음의 상태를 점검해서
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해주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세례나 성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외적으로 인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례를 행하는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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