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구원론

삭개오를 통해 본 구원

오은환 2013. 11. 15. 20:21

 

화려한 여리고 도심 속에 살았던 삭개오는 세리지만 종교적으로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세리장이며 부자였습니다(눅19:1).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과 율법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에 그의 삶이 확실히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떤 충격을 받았을까요?

회심전 바울처럼 율법에 흠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 같은 그가 주님과의 만남으로 큰 변화가

따라왔기에 우리는 <그 대화를 복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변한 삭개오를 향해 충격적으로 기록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예수님을 만난 이후 변화된 삭개오를 통해 몇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1. 율법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바뀜

 1) 율법을 가까이 함

  그동안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던 삭개오는 율법에 명한대로 타인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들에 대해 4 배로

  갚겠다고 회개합니다(8).

  나단의 이야기를 듣던 다윗도 속여 빼앗은 양은 네 배로 갚아야 한다고 맹세합니다(삼하12:6).

  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중히 여겼기에 이런 율법 조항들을 매우 잘 알았습니다. 습관처럼 잘 수행합니다.

 

 2) 성령을 통해 율법의 깊음을 깨달음

  사도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통해 임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할 때, 율법은 그 빛이 매우 빈약하다고 결론

  짓습니다(고후3:7-11).

  그러나 율법 속에 역사하신 성령으로 사는 삶 자체는 매우 힘이 있고 의롭게 하십니다(시119:18,27,3

  2,73130). 

 

  율법은 문자 그 자체로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갈4:9).

  그러나 성령의 조명을 통해 본 율법은 너무 깊고 아름다운 생명이 있습니다(갈3:24). 

   -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신32:29) 

 

 

  ※ 이스라엘아 들으라,...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4-5)

   이 말씀은 이러한 삶을 살 수 없는 자연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또 지킬 힘을 공급해 주심으로서 이러한 삶이 행복임을 알려줍니다.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30:6)

 

  율법은 그 자체로는 너무 무겁습니다.

  그러나 성령주셨기에 성령은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율법을 통해 보게 하고(롬3:19), 더 나아가서 죄인된 그들을 속죄제물이 되시는

  예수님에게로 인도합니다(갈3:24).

  율법은 그 자체로 의가 아니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롬3:21) 그리로 인도하기에

  (갈3:24) 이스라엘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선물이 됩니다(롬3:1-2, 9:4)

 

2. 율법과 성령을 온전히 알게 된 것을 삭개오의 변화된 삶으로 증거 

  이전에 삭개오는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화목제물을 드렸지만 그것이 진정 의미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동물의 피를 통해 드려지는 속죄제사가 자신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며 거기서 의를 얻는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삭개오는 이런 심중의 생각들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무척 고민했습니다.

  마침네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을 때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달려나갔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 주님의 말씀으로 니고데모처럼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성령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받아도 되고 안받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옛 계명을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과 이웃을 <최고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시면서 동일한 조건을 제시합니다.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옛 사람이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주신 것 같은 사랑(요일3:16)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 합니다.

 

  ★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삭개오는 성령의 깨닫게 해 주신 은혜를 통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듭남의 놀라운 일이 그의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문자적인 율법준수가 진정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통해 생명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보게 됨으로, 진정 율법을 주신 목적을 알고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로 내 놓습니다.

  율법의 문자적인 조항은 없으나 성령을 통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 행함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면서 비로서 기뻐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눅19:9)

 

  더 충격적인 것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면서 대속의 은혜를 모르며, 성령이 없는 자들을 일컫어

  <잃어버린 자>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눅19:10).

 

  잃어버린 자는 구원이 없는 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이 없는 자이며, 따라서 처음부터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비록 그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따라 율법을 따르지만 율법을 주신 목적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청중들을 향해 너의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것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합니다(마5:20).

  이 말은 곧 구속을 알지 못하고, 성령이 없는 자들이 율법을 따라 문자적 준수를 하는 자보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의 의가 훨씬 크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알려주며,

  또한 그러한 삶의 희생이 훨씬 크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닌까 율법에 대한 문자적인 준수하던 삶보다 비교할 수 없는

  큰 희생이 따랐다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음과 그러므로 인하여 주어진 성령의 거룩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에게 보증하는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성령을 따라 살아가면 성령이 그 자녀를 보증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