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요람인 에덴동산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전체를 온전히 보게 하는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실행에 있어서 지혜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잘 보아야 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 것과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명령을 성례라는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매우 올바른 관점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성찬이나 세례를 행하면서 어떤 생각을 가집니까?
1. 생명나무 실과와 선악과는 시험을 위해 존재하는가?
성례라는 관점은 매우 잘 보았는데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될 때 어려움이 많습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시험하기 위해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례를 시험으로 주셨을까요? 은혜로 주셨을까요?
당연히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성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성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데서 풀리지 않습니다.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영생하는 길로 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외적 표징이라는 것은
대부분 수긍합니다.
반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성례인지 아니면 첫 사람 아담의 순종을 시험하는 것인지 난감합니다.
성례의식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숨어 있습니다.
성자로 인한 죄를 씻어 정결함과 성령의 내주로 인한 거룩함 그리고 성부 하나님으로 인한 의롭다 하심이
그렇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즉 선악과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성도의 삶의 규칙을 설명하는 의식입니다.
그것이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2. 성례의식이 시험인가? 은혜인가?
1) 할례와 제사
에덴동산에서의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성례는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깨어졌고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그런 성례가 집행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타락 이후 주어진 성례가 바로 할례와 제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두려워하여 생식기 부분을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치마로 가렸던 것은 자신들을 통해 주어진
인류의 번식에 있어서 저주받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다른 곳을 가리지 않고 오직 그 부분만 가렸습니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 부분의 끝을 베어내는 의식입니다.
결국 아담이 두려워했던 곳을 제거함으로 다시 회복됨을 알려주는 의미있는 의식입니다.
죄로 인한 불결함을 제거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어 정결하게 됨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드려지는 제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이 끝날 때까지 지속됩니다.
제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합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성례와 동일합니다.
2) 세례와 성찬
구약교회에 주었던 성례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실체인 자신을 드림으로 인해 바뀌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거기에 맞게 세례와 성찬으로 드려집니다.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같고, 성찬은 제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세례와 할례는 그리스도로 인해 죄를 씻고, 성찬과 제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신약의 성례는 주님 앞에 갈 때까지 혹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지속됩니다.
주님이 오신 후에 성례는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서 새로운 포도주를 마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 에덴동산에서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성례 -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계2:7) - 에 참여합니다(계22:2,19).
3. 성례와 예배의 연관성
★ 성찬(제사)과 예배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구약에도 예배가 있었습니까?
제사가 곧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예배자가 함께 죽습니다(갈2:20).
오늘날 예배가 무엇입니까?
종국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함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4. 구원받았기에 받은 선물 - 성례
★ 그리스도와 연합(참여, 안에 거하심, 한 몸)
종교개혁을 감행했던 칼빈, 루터, 쯔빙글리는 성례에 대한 차이로 갈라졌습니다.
성례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가톨릭의 성례(화체설)가 틀린 것은 알겠는데 정답이 무엇인지 논란이 많았습니다.
급진개혁을 추구했던 재세례파는 구약과 신약의 성례를 철저히 구분하여 분리하려고 했습니다.
엄청난 일을 했던 개혁주의자들은 성례 앞에서 난파할 뻔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칼빈의 견해가 가장 성경적이라는 것을 루터교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성례는 구원받았기에 주신 외적 증표입니다.
또한 그 성례를 통해서 계속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하게 했기에 은혜가 넘칩니다.
불가피하게 성례를 집행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구원받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원리를 알았던 칼빈은 두서없이 성례를 아무나 베푸는 것을 금했고,
반대로 성례를 굴레로 삼아 신부나 목회자의 권위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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