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난해구절

장남에게 엄격하신 구약의 하나님?

오은환 2014. 8. 9. 18:35

영지주의자 말시온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전쟁을 즐겨하고 엄격한 구약의 하나님과 사랑과 은혜가 풍성한 신약의 하나님을 구분하고,

서로 다른 신이라 말했습니다.

 

오늘날도 말시온처럼은 아니지만 신구약의 하나님의 성향이 다르거나 혹은 그 통치 스타일이 다르지 않는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시나요?

 

구약의 하나님은 장남인 이스라엘을 엄격하게 다루었는가요?

반면에 신약의 차남인 이방인에게는 사랑으로 용서하는 하나님인가요?

아닙니다. 모두 동일합니다.

 

1. 드시고 안으시는 하나님

 

 * ...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63:9) 

 

자녀들을 키워본 분들은 그들을 사랑하는 표현을 잘 이해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들어 주어야 하고, 힘겨워할 때는 안아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일어나서 걷고 달리기 전까지 부모의 마음과 손길은 늘 자녀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구약속의 하나님은 마치 어린 아이들을 다루듯이 그의 백성들을 들어주고 안아주었습니다.

특별히 출애굽의 모든 과정은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 상황을 이사야는 아버지로서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었다고 표현합니다. 

 

2. 두 팔을 벌리시고 부르시는 하나님

 

 *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을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65:2, 롬10:21)

 

구약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출애굽의 시기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도 말을 잘 들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떠난 패역한 백성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루 종일> 집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아버지의 모습이(눅15:20) 장남인 이스라엘에게도 나타납니다.

 

어린 아이를 이해하며 달래는 듯한 <손을 펴신>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돌아서기만 하면 먼저 달려갈 듯한 모습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부르심도 신약의 교회(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하나된)를 부르심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삼기 위함입니다.

동일한 목적, 동일한 방법, 동일한 결과가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되었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항상 동일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구약을 통해서도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신약을 통해서도 더욱 선명한 사랑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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