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방언의 은사에 대해 많은 논쟁들이 있습니다.
다른 곳은 거의 일치를 하지만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이 외국어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 없는 하늘의 언어인지에 대해서 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유일하게 방언의 은사와 더불어 통변의 은사를 언급합니다.
실상 방언의 은사가 없으면 통변의 은사도 불필요합니다.
*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10)
은사를 다루었던 다른 성경을 보면,
① 로마서 12장에는 방언이나 통변의 은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② 에베소서 4장 역시 방언이나 통변의 은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더 구체적으로 방언 은사와 통변을 연결합니다.
그래서 방언을 통해 더 유익함을 구하라 합니다.
*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14:13)
방언과 예언은 말씀을 선포하는 측면에서 매우 유사합니다.
오순절 예언을 했던 요엘 선지자는 그 날 많은 사람들이 예언할 것을 말했습니다(욜2:28, 행2:17).
실질적으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자 예언이 아닌 방언을 했습니다(행2:4).
<예언과 방언은 계시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각각 필요한 곳에서 적절하게 나옵니다>.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으로 나타난 방언의 내용은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 - 복음>이라고 말씀합니다(행2:11).
여기서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통변이 필요한 방언은 외국어일까요?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하늘의 언어일까요?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만 마디의 방언>은 누가 행한 것일까요?
*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4)
* ...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전14:35)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자들 중에는 <특별한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바울은 이런 자들이 스스로 선지자나 신령한 자들로 여겼던 여자들임을 드러냅니다.
*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말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14:37)
혼란스러웠던 고린도 교회가 특별히 말씀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말씀 즉 계시의 전달 형태가 알아듣기 쉬운 예언이라면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옳은지 분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14:29)
* ...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4:6)
그런데 계시가 전달되는 또 다른 통로로 <방언>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방언에 관하여도 예언과 똑 같이 취급합니다(고전14:27).
먼저는 통변이 따라 와야만 교회내에서 시행해도 된다고 허락합니다(고전14:28).
그러면 방언이 외국어뿐일까요?
아니면 외국어와 더불어 알아들을 수 없는 미지의 언어가 포함되는 것일까요?
속시원하게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쉽사리 정죄의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외국어로만 한정한다면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방언을 하라고 말했다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14:28)
고린도 전후서 서신서에는 <수사학이 많이 사용되었기에 깊은 분별이 요구>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남아 있습니다.
19 세기가 되기까지 사실 방언 문제는 논란이 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더 확실한 자료들이 나오기 전까지 이런 문제들로 형제들을 정죄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에게 손실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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