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때 학교 앞의 고하도 섬에는 지체 부자유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다리도 없었고, 섬에 사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정기적으로 다니는 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학기간에 봉사활동은 통통배를 빌려서 가야만 했습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겨울나기에 도움을 주려고 땔감들을 모았습니다.
산에서 나무들을 모아다가 장작으로 패고, 톱으로 자르기도 했습니다.
그곳은 몸도 정신도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들로부터 30대 어른들까지 같이 살았습니다.
주변은 철조망으로 둘러 쳐졌고, 환경은 아름답지만 늘 감시 속에서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한 이들이 혹시 바다가에서 실종되는 것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두 세번 방문하면서 그곳을 담당하는 목사님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마치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들을 보며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과 같았습니다.
침묵이 흐를 때 목사님은 무겁게 입을 여셨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에게 존재의 이유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나는 그 때까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많은 부분들이 이들을 만남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들을 만난 것은 내게 큰 복이었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지를 보게 되었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 재능들을 어떻게, 어디로 사용해야 함을
정립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이들의 존재감은 세상에서 미미할지도 모릅니다.
몇몇의 관심있는 사람들이나 국가 기관의 관심 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분들은 돌봄의 손길이 있어야만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의 존재감을 새롭게 봅니다.
그는 동네에서 어떤 존재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부자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들을 주어 먹고살았습니다.
도대체 그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는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을까요?
무엇을 감사했을까요?
타인에게 자신을 보여줌으로 그 존재감을 확인하도록 하는 역할을 누가 하고 싶어할까요?
그런 부르심이 사명이라 한다면 얼마나 힘겨울까요?
부자는 나사로를 통해서 왜 자신의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했을까요?
왜 이웃을 향해 부르심을 받았음을, 그리고 그들을 사랑해야 함을 보지 않으려 했을까요?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거지 나사로처럼 미미한 존재감을 가진 가난한 교회들이 많습니다.
큰 교회 주변에서 전혀 영향력이 보이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많은 가난한 목회자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마치 거지 나사로처럼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 만으로도 존재의 이유가 됩니다.
*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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