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구원론

니고데모는 왜 몰랐을까?

오은환 2016. 9. 19. 08:57

구원론의 핵심중의 핵심인 거듭남은 어떤 것일까요?

요한복음 3장을 통해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책망합니다.

최고의 성경지식을 갖춘 니고데모가 깜짝 놀랐다면 주변의 지식인들 역시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모른 자들이 많다고 보아야 합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3:4)

 

1. 구약속의 거듭남 - 구속과 마음의 할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수많은 사람들 역시 그런 중요한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구약성경을 뒤져봐도 거듭남의 구체적인 방법을 기술한 곳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께서 마음의 할례를 행함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먼저 누린다는

큰 그림이 있습니다.

 

2. 구약 이스라엘은 언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경험했는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한 거듭남은 오순절 이후에 일어날 사건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계속해서 일어났던 사건을 현 시점에서 물어보고 알려준 것입니다.

 

성경연구의 기본은 본문 속에서 어떤 동사를 사용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오순절 이후에 일어날 일이라면 <미래 동사>를 사용했겠지요?

그러나 니고데모 이야기 가운데 단 하나의 미래동사도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 <거듭나지> 아니하면...(3:3,5)

   여기서 '거듭나다'는 동사는 현재형(is born)을 사용합니다.

 

 * 육으로 <> , 성령으로 <> ..(3:6)

   '나다'(having been born)는 수동태 완료 분사입니다

   즉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 것을 증언하노라...(3:11)

  여기서 '보다'(have seen)라는 동사는 미래의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일어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3. 거듭남의 사건 - 할례

니고데모를 비롯한 이스라엘은 왜 거듭남에 대해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람이 이리저리 부는 소리와 느낌을 통해 분명하게 바람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은 그와 같이 인식은 하지만 가시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니고데모는 거듭났을까요?

당연히 거듭났지만 자신이 못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는 세례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지만 할례의 복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경험하며,

그 결과 성령이 내주하는 연합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입니다(3:14).

 

모세는 이런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이스라엘을 복되다고 찬양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33:27,29)  

 

4.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도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공생애 사역의 중심 메시지로 하나님 나라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너무 잘 알았고, 때때로 자부심이 지나쳐서 이방인들을 멸시하기도 합니다.

구약 성경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에 대해 무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강조했고, 육신적 자손(할례)이 그 나라를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 땅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수 있다고 책망합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생각을 지닌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 나라는 혈육이 아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이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고 정정해줍니다(3:3,5).

그러면 할례를 통해 거듭남을 경험했는데 왜 니고데모나 이스라엘 청중들은 물과 성령으로 연합된 상태가 희미한 것일까요?

 

5. 물과 성령

거듭남을 일으키는 두 가지 - 물과 성령 - 는 무엇일까요?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입니다.

 

거듭남은 예수님을 통한 구속이 있어야 합니다.

구속의 결과 성령이 내주하면서 거듭남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구속은 예수님과 성령님의 공동사역입니다.

굳이 나눌 것도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였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3:5-7)  

 

6. 구약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 갈망하고, 들어갔는가?

복잡한 듯한 질문은 예수님의 한 마디 말로 해결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를 보았고, 가시적인 통치가 메시아를 통해 이 땅에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했고,

그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혈통적인 유대인들이 자동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열매 맺는 자들만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21:43)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도래를 간절히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어찌보면 가장 간절히 바랐던 자들이 제자가 된 것입니다(1:6).

다른 많은 사람들도 가시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요셉)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23:51)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 속에 구속함이 있었고, 성령이 내주하여 조명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소망은 그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그들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할례가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호칭조차 받지 못합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고 있었고, 또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소망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몰랐지>, 그들 속에 구속과 성령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