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서신서

갈라디아서

오은환 2014. 2. 28. 21:53

 

 

바울의 서신서 중 가장 일찍 기록된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은 지금의 터키 지역의 한 부분이면서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가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1차 선교 여행 때 이곳을 방문했고, 교회들을 설립했습니다.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에게 보내진 편지는 남부 갈라디아 지역인지 아니면 북부 지역인지 논란이 많습니다.

북부지역은 험준한 지형이며 바울의 한 번도 선교여행을 하지 않은 곳으로 보아서 남부 갈라디아 지역이라 보는

견해가 옳은 것 같습니다.

 

또한 편지가 기록된 시기에 대해서도 남부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에게 보냈다면 주후 49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른 서신서들과 달리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기가 중요한 것은 곧 바로 이어지는 예루살렘 총회(주후 50년)

때문입니다.

 

유대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의 일부가 이방인 가운데 있는 교회들을 방문해서 이상한 가르침을 행했습니다.

예수를 믿더라도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만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으로 일어난 혼란으로 초대교회의 일치된 견해를 이루기 위해 주후 50년 예루살렘 총회가 열립니다.

 

만일 갈라디아서가 예루살렘 총회 이후에 기록되었다면 굳이 이런 편지를 장황하게 쓸 필요도 없었고,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서 간결하게 모든 결정들을 전달하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초기 서신이어서 그런지 매우 투박합니다.

바울의 감정이 숨김없이 나타나며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1.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바울은 매우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어갑니다.

그만큼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직면한 문제들이 심각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그들을 다시 세워야겠다는 각오도 드러냅니다(갈4:11,19).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을 <어지럽게 했던 자들>은 누구입니까?(갈5:12)

여기에 대해 대표적으로 두 가지 견해만 보겠습니다.

 

① 당대에 널리 퍼진 유대주의적 영지주의라는 견해

영지주의자들은 크게 이방인들로 구성된 자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유대인 영지주의자들로

나뉩니다. 이들 중 후자가 갈라디아 교회들을 어지럽히지 않았는가 하는 이론입니다.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지만 서신 안에서 꼭 이들이라 하는 증거가 부족함으로 제외하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②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견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견해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예루살렘 교회는 급속하게 부흥하였습니다.

하루에 삼천 명 혹은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 왔습니다(행2:41, 4:4).

 

이들이 어려운 가운데 태동되어 부흥하는 이방교회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과 이방 교회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행하지도 않고 율법을 준수하지도 않았습니다.

할례를 행하고 율법에 열심인 자신들의 교회와 너무도 다른 모습에 강경한 반응을 보입니다.

 

 *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행15:1-2)

 

이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들은 이전부터 율법에 열심을 내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행15:5)

 

예루살렘 총회는 이런 문제에 직면해서 열린 것입니다.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을 괴롭게 한 것이 곧 갈라디아 교회들이 겪은 동일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행15:23-24) 

 

2. 예수를 믿으면서 동시에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행하는 것이 왜 다른 복음인가?

갈라디아서는 시작하자마자 격한 말들을 쏟아 냅니다.

특별히 유대에서 온 자들이 전한 복음은 진짜가 아니라 <다른 복음>이라 정죄하며,

그런 것들을 전하거나 받는 자들은 모두 저주를 받을 것이라 판단합니다(갈1:8,9).

 

바울과 사도들이 영지주의 교훈을 가리켜 <다른 복음> 혹은 <다른 영>, <다른 예수>라고 정죄한 것을 보면

(고후11:4), 이와 같은 가르침을 심하게 표현한 것이 매우 이례적이라 보입니다.

 

왜 영지주의와 유대 율법과 할례를 준수하는 자들을 동일한 인물들도 취급했을까요?

이들 모두 <원 복음>과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 복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아버지 앞에 서지 못하기에 바울은 다른 복음을 거짓 복음이라 정죄했습니다.

원 복음과 비슷하다고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다른 복음은 없나니...(갈1:7)

 

다른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을 통해 만들어지고 증거되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근원이 사람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합니다.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

 

 1) 유대교도 다른 복음이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과 이전에 믿었던 유대교를 비교합니다(갈1:14).

유대교가 사람에게서 난 것으로 <조상들의 전통>이라 정의를 내립니다.

 

 2)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지식들의 산물이 아니다

바울은 심지어 사도들에게 조차 배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갈1:17).

사도들의 권위를 무너뜨리려 하는 말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근거한 것임을 확인시켜주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3. 유대로부터 와서 가르쳤던 자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이 부분은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조금 세분해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면서도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1)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자들

예수를 믿으면서 동시에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해야만 구원을 받는다 주장하는 자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율법의 역할이 사람들을 죄 아래 가두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임을 아직껏 모르기 때문입니다(갈3:24).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모르는 자들은 거듭난 자가 아닙니다.

 

이들이 무엇 때문에 교회 공동체에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바울은 이런 자들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

선언합니다. 이런 자들은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입니다(갈4:21).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난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갈이 사라를 무시한 것 처럼, 성령으로 난 자들을 핍박합니다(갈4:29).

 

 2) 예수를 믿으면서 율법을 귀히 여기는 자들

어감의 차이로 느끼기도 하지만 예수를 믿는 것과 율법을 귀히 여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림자로서 율법은 실체이신 예수님을 문자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에 완전한 감동으로 드러내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조명이 있었기에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의 하실 일을 보게 되었지만(시119:18, 눅24:44),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몸을 단 번에 드리는 놀라운 일과 그 사랑을 몸소 보이신 십자가 사건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문자를 마음에 새겨보는 것과 실체를 마음에 담은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 고린도 후서 3장에서 매우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옛 언약도 영광스럽지만 새 언약에 비하면 너무 희미하다고 알려줍니다.

 

새 언약에 나타난 완성된 사랑을 가진 자들은 옛 언약에 나타난 사랑을 다 버리고 새롭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 언약을 가볍게 포용하면서 완성된 새 언약의 사랑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율법에 열심을 가졌던 자들을 단순하게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었던 야고보 역시 유대인들에게 존경 받았던 인물입니다(행15:12-21, 갈1:18-19, 2:9).

야고보와 더불어 함께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다수가 율법을 귀히 여겼던 자들입니다.

 

 * 그들이(야고보와 장로들)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 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행21:20)

 

 

4. 바울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교훈 사이의 유사점이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교훈을 다르다고 보기도 합니다.

성경을 조심스럽게 읽다보면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비유들을 사용해서 진리를 전달했는데 왜 사도들은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사도들이나 복음 전도자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은 매우 간단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다 이해해서 자신의 언어로 간단하면서도 쉽게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었던 수많은 비유들을 사도들은 딱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히브리서를 누가 기록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기록자가 가진 영적통찰력은 사도들의 것과 동일합니다.

 *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6:7-8)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과 부활 후에 전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입니다(마4:17, 막1:15).

바울 역시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행28:2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