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던 다메섹 여정은 감동의 연속입니다.
지독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고, 그 이후 바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끈 멘토가 다메섹의 아나니아입니다(행9장, 22장, 26장).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아나니아를 어떻게 소개할까요?
이방인이었던 누가의 신학이 옳다는 가정 아래 또 성령의 감동 아래서 정확하게 묘사했음을
인정한다면 아나니아에 대한 소개는 큰 충격을 줍니다.
*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자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행22:12)
율법을 따라 살았던 아나니아를 경건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누가는 세례 요한의 부모인 샤가랴와 엘리사벳도 흠이 없는 자로 소개합니다.
*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1:6)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구절들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워합니다.
왜 어느 곳에서는 율법이 배설물로,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경건을 측정하는 도구가 될까요?
우리가 복음서나 유대인들이 나타난 신약성경을 볼 때 율법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있어야만
혼란을 피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유대인들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거듭난 자들입니다.
둘째, 율법은 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보아야 합니다.
*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2:5)
예수님은 율법 자체를 무가치하거나 배설물이라 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세운 기준(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의라고 믿고 따랐던 것들이 배설물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변개할 수 없는 진리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 왜 율법준수를 목숨 걸고 행한 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은 책망받았을까요?
성령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정한(장로의 유전)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을 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을 '자기 의'라고 표현합니다(롬10:2).
그래서 예수님은 서로를 비교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의(자기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적당히 성령따라가는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현재 다수가 이해하는 복음서는 수박 겉 핥기 수준도 안됩니다.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행위 구원론자'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까?
'율법과 성령'의 연관성과 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
이스라엘 가운데 성령의 내주 그리고 거듭남을 전제로 보아야만 합니다.
이런 전제가 없으면 천 년이 지나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메섹의 아나니아가 율법을 따라 경건한 자로 표현된 것은 그 안에 내주한 성령을 따라
온전히 율법을 행했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 - 는 것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