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들은 신구약의 무게중심을 체크합니다.
구약을 율법으로 신약을 복음으로 이름짓고 그 무게를 달아봤습니다.
(이런 기준도 크게 잘못되었지만 현재 통용되닌까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세 가지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① 율법 〉복음
② 율법〈 복음
③ 율법 = 복음
1. 율법 〉복음
초대교회 이단자 말시온은 구약을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신약의 예수님은 사랑을 강조하시면서 용서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입니다.
율법의 기준이 복음의 요구보다도 훨씬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신구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선언합니다.
구약은 하등한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폐기하고 말았습니다.
신약의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이 보낸 자가 아니라 다른 참 하나님이 보냈다는 영지주의자의
시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2. 율법〈 복음
상당수의 신학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구약 율법은 겨우 문자에 기록된 것으로 매우 한정적으로 보려 합니다.
구약 사람들은 율법에 기록된 것만 지키기에 신약보다 훨씬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신약성경의 요구를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합니다만 구약은 그렇지 못했다는 주장합니다.
맞는 이야기일까요?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의 내주 차이에서 그렇게 보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성령이 내주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를 받지 않고,
삶의 한계를 지녔다고 주장합니다.
반대로 신약성도들은 성령이 내주하기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사랑과 희생을
요구받았고, 또 성령을 통해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3. 율법 = 복음
매우 바람직한 평가입니다.
율법은 비록 한시적이만 모형으로서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 역할입니다.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예비하기에 그만한 수준을 요구합니다.
실체이신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왜 완성시켰단 말을 사용할까요?
율법이 곧 예수님 자신을 가리시키기에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하고 죽으심으로
다 이루었습니다.
율법과 산상수훈이 차이가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다 나타난 것들을 정리해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약에서 성령의 내주와 조명이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율법이라 칭하는 옛 언약이나 복음이라 말하는 새 언약은 모두 동일한 것을 요구합니다.
*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요일2:7)
옛 계명이나 새 계명 역시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모두 동일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약만 성령을 따라서 그런 삶이 가능하고, 구약은 성령이 없고 내주하지 않아서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 모든 성도들은 성령을 부어주셨기에 하나님과 이웃을 최고로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사람에게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사랑의 힘을 제공함으로 가능합니다.
* 소망이 우리에게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영생, 구원)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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