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컴의 발달은 잘 전달하는 능력을 중시여깁니다.
재미있고 간결하게 또한 유머를 섞어서 전하면 금상첨화입니다.
거기에 목소리까지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진리를 전할 때는 몇 가지 더 있었으면 합니다.
진리는 뚜렷해야 하며 그 결과 확신있게 전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라도 말하는 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뚜렷하지 않고,
확신이 없으면 그 효과는 크게 떨어집니다.
최근 종교개혁자들과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의 책을 보는데
경건한 모습이나 그들이 겪었던 고난과 수고 등은 감동스럽지만 아쉬운 부분이 남습니다.
성경을 구속사로 보는 관점은 훌륭한데 구속사를 온전히 설명했는가 하는 부분은
시원하지가 않습니다.
이들의 책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구약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설령 고민을 했더라도 해결책은 멀게 느껴집니다.
구약 성도들의 중생과 성화에 있어서 예수님의 구속하심과 성령의 내주에 대한 연결성이 안보입니다.
구속사는 있는데 정작 중요한 성령의 내주와 조명 그리고 인도하심이 없는 중생과 성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 곧 중생(거듭남)했기에
옛 사람처럼 죄인이 아니라 새 사람으로 거듭난 자이며 의인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선명한 진리를 구약에 적용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일까요?
이 중생(거듭남)의 복음은 구약 시대의 이방인들에게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 때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오직 구약 성도들인 이스라엘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습니다.
※ 그 때(구약시대)에 너희(이방인)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엡2:12)
종교개혁자들과 많은 청교도 신학자들이 구속사를 다루지만 성령의 내주와 조명 그리고 인도하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성령론이 구약 성경 부분에서 누락되었습니다.
구속사를 말하지만 뚜렷하지 않게 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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