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성령

존 오웬의 고민(성령론)

오은환 2021. 5. 4. 23:37

존 오웬은 영국이 낳은 최고의 청교도 신학자입니다.

그는 신학자일뿐만 아니라 목회자로서도 훌륭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부른받은 지역 교회에서 충성했고, 성령론에 대한 좋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의 삶 역시 철저하게 성령을 따라 살았습니다.

크롬웰이 내민 정치적인 손을 거부하여 대학에서 물러났고, 출세의 길에서 퇴보된 듯 했지만,

그가 곧바로 실각하면서 처형을 당했기에 오웬의 선택은 목숨을 건지게 했습니다.

 

오웬(1616-1683)이 60대가 되어 그의 신학이 성숙했을 때 성령론을 썼습니다.

사실 성령론이 중요한 것은 그가 이해한 성경의 모든 것이 성령론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번역자는 오웬의 성령론 책의 제목에 <개혁주의>를 붙였습니다.

<존 오웬 개혁주의 성령론>으로 이름을 붙여도 무례하지 않게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했던 고민도 찾았으면 합니다.

그의 성령론은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재창조(예수님의 성육신)까지 연결됩니다.

중생과 성화까지 매우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특별히 그가 고민한 부분은 구약성경의 성령론 부분입니다.

간략하게 언급하면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구약에서 뚜렷하게 성령의 일하심을 찾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도들 가운데 중생(거듭남)이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그 부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중생과 중생의 교리는 구약성경에도 있다. 하나님의 모든 선민들은 그들 당대에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복음서를 보면

중생에 관한 교리는 더 크게 확장되어 옛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중생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p.183)

 

존 오웬은 구약시대에는 중생이 있었지만 희미했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중생했다고 판단합니다. 이것은 오웬의 큰 오해에서 나온 판단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어떻게 중생했느냐에 대해 침묵하지만 약간의 암시가 나타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중생을 <마음의 할례>에서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이(중생) 교리는 이미 구약 성경에 언급되었고 약속된 것이다. 여기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돌같은 마음을 버리고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약속하셨다"(p.182)

 

오웬이 언급한 중생의 표징으로서 마음의 할례는 실상 성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아들에게는 찾기 어려운 중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칼빈이 할례를 중생으로 표로 보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칼빈이 유아세례를 강조한 것은 유아의 거듭남을 구약의 할례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웬은 이 부분이 매우 희미합니다.

 

"세상이 처음 창조될 때 어떤 사람들이 중생하였다는 구약 성경의 중생에 대한 교리, 또는

중생에 관한 계시는 그렇게 선명하지 못하다"(p.181)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하는 고민을 오웬 또한 고백한 것입니다.

오웬의 구약이해는 많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믿음의 담대한 행동과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by), 성자를 통해서(through),

명백하게 성부에게(to)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엡2:18)"(p.158-59)

 

오웬의 이런 주장은 구약성경에서 온전한 구속사를 보지 못한 느낌입니다. 

구속과 성령의 내주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기에 신약과는 다른 형태로 아버지께 나아간 것으로 추측합니다.

구약의 성례가 집행되는 성막에 대한 이해부분도 결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보다 앞선 신학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지혜일까요?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앞서간 분들의 부족한 면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

주셨구나 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를 느끼면서 또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를 발견하고, 우리 또한 수고한 작품에 결함이 있어도

그것을 숨기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으면 합니다.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계시의 점진성과 그 해석이 더 뚜렷해질 것으로 보면 위안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선 신학자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그 사상들을 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중히 여기며 우리 또한 발전의 징검다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웬의 성령론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좋은 선물임이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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