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난해구절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오은환 2021. 5. 21. 15:54

신학자들은 바울 서신을 연구하면서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난감해합니다.

많은 고민의 흔적들이 푸념으로 나타납니다.

 

왜 바울은 율법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가?

왜 복음서나 야고보서는 율법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가?

 

이런 의문들은 수많은 책들을 저술하는 동력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이한수 교수님은 말씀했습니다.

"현재 바울서신에 관한 책들이 6,000 권 넘게 나왔을겁니다"

 

신학이란 자신이 연구한 성경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독교인이든 자신의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폭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신학은 존재합니다.

 

바울 서신과 복음서는 충돌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무지함으로 인한 오해일까요?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구약 성도들에게 율법은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율법이 먼저냐? 의롭게 됨이 먼저냐?"

당연히 의롭게 됨이 먼저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에게 율법이 주어집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그들에게 율법의 기능이 작동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묘사합니다.

결혼을 한 것은 의롭게 된 시점이고, 그 이후에는 결혼으로 인해 둘이 한 몸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 결혼이라면 율법은 결혼생활의 안내서와 같습니다.

안내서에 따라 결혼생활을 하면 잘못된 것은 고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율법은 구약 성도들이 구속함을 받았고 성령이 내주하였다는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구속과 성령의 내주와 조명 그리고 힘주심을 따라 율법은 펼쳐집니다.

그래서 구약성경과 복음서는 율법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관점으로 묘사합니다. 

 

*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19:7-11)

 

2. 이방인들에게 율법은 무엇인가?

불신자인 이방인들에게 율법은 그야말로 재앙에 가깝습니다.

율법(양심)이 선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죄가 부각되며

자신의 무능함도 드러납니다. 율법은 이방인들의 죄를 드러내며 정죄함에서 멈춥니다.

 

반면에 구약 이스라엘 성도들은 구속과 성령의 내주와 조명 그리고 힘 주심이 있었기에

율법을 찬양할 수 있었고, 즐거워했으며(시119:162,174) 사랑했습니다(시119:113,119,140,159,165,167).

 

*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읇조리리이다(시119:47-8)

 

불신자들인 이방인들은 율법 앞에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야말로 저주의 연속입니다.

 

*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롬6:17)

*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5-6)

 

바울서신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을 읽을 때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문맥에 따라 주의 깊게 읽되, <나, 너, 너희, 우리>라는 용어를 잘 살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라는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방인 성도들과 유대인 성도들 모두를 포함한 단어로

생각하면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됩니다.

 

더불어 하나 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라는 단어가 과거 이방인 성도들이 불신자일 때의 상태를 언급하기도 하고,

현재 믿음으로 의롭게 된 상태로 나뉘어서 묘사하기에 문맥에 따라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율법이 이방인 신자들의 과거를 언급할 때는 정죄를 언급하기에 매우 부정적이며,

거듭난 현재를 언급할 때는 구약 성도들처럼 새 사람으로서의 삶의 지침서가 됩니다.

물론 의식법들은 이미 완성되었기에 더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 채 율법을 다루면 곧바로 난해함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