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서 이단을 구별하는 일을 하는 자들을 감별사라고 부릅니다.
감별사라는 말은 병아리의 암수 구분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수컷보다는 암컷 병아리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은 병아리를 보고 암수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감별사들은 쉽게 합니다.
이단 감별사들은 주로 어떤 자들일까요?
그 분야에 전문가이며, 때로는 이단에 몸 담았다가 나왔기에 강한 사명감이 있습니다.
이단을 구분하고 싸우는 일은 단순히 지식으로만 가능하지 않고,
현장에서 이단들의 끈질긴 도전과 술수에 대응하기 위한 야성도 갖추어야 합니다.
이단들은 크게 구원론과 종말론에서 문제를 일으키며 정죄를 받습니다.
종말론 역시 구원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이단 감별사들은 성경의 모든 영역에서
온전한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특별히 이단 감별사들의 구원론은 매우 중요하기에 여기서 다루고자 합니다.
이단 감별사들은 "어떻게 거듭났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흔들리면 이단들의 잘못은 지적하지만 정답을 제시하지 못하기에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1.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너무도 쉬운 말이지만 죄인으로 판명되는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와 범주가 명확해야 합니다.
타락 전에 아담과 하와가 부부싸움을 했다면 죄인으로 판명되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에덴동산에 죄인이 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일만 죄인으로 정죄됩니다.
여기서 죄가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2. 의로운 상태란 무엇인가?
죄인이 된다는 것은 의인의 상태가 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의인이 아니기에 죄인이 된 것입니다.
중간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상태란 무엇일까요?간략하게 말하면 지음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 결과 성령이 내주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떠나고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자들을 죄인이라 부릅니다.
자질구래한 죄들을 짓느냐 짓지 않느냐가 죄인이야 의인이냐를 가름하지 않습니다.
죄인과 의인의 기준은 그리스도가 안에 계시는가 곧 그가 보낸 성령이 내주하신가의 상태를
통해 호칭이 달라집니다.
3. 거듭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아마도 이 부분에 대하여는 제대로 된 감별사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완벽한 이론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쉬운 곳을 너무 어렵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더 정확합니다.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거듭남에 있어서 물이 무엇인지가 논란입니다.
성령처럼 실체로 쓴 것이 아니라 상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물이 가리키는 상징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이단 감별사 진용식 목사는 물을 <말씀> 곧 <복음>이라 합니다.
어떤 자들은 세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세례식을 거행할 때 거듭난다는 천주교적인 의미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문제는 말씀(복음)을 들을 때 거듭남이 일어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절반은 맞지만 완벽한 대답이 아닙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아나 어린 아이는 거듭나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단 감별사들이나 신학자들이 거듭남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하는 구절들은 대부분이
바울서신입니다.
즉 이방인들이 처음 복음을 접하고 받아들이므로 거듭남이 일어났던 부분입니다.
반대로 보면 이미 거듭났던 구약 성도들이나 복음서를 보면서도 청중들이 거듭났다는
인식이 없습니다.
이단 감별사들의 견해는 결국 재세례파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의 거듭남 문제를 등한시하게 됩니다.
"복음을 듣고 이해하고 고백하지 못하면 거듭남이 없다???"
구원론이 왜 어렵고, 왜 이단이 많이 나오게 할까요?
구약 성도들의 구원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약 이방인들의 거듭남만을
설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두 과정을 모두 제대로 이해할 때 온전한 구원론이 성립됩니다.
또한 복음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단 감별사들이 이런 부분들을 제대로 연구하고 확립한다면 이단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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