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난해구절

바울은 왜 아라비아로 갔는가?

오은환 2015. 8. 3. 09:52

바울은 다메섹 회심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교회와 성도들을 심히 핍박한 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와 예수님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 스데반 집사와 같은 신실한 성도를 죽이게 된 것입니다. 


회심후 바울은 다메섹에서 즉시 제대로 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아 되심입니다. 

 *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행9:22) 


바울의 행적을 보면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파한 후 삼 년간의 행적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는 다메섹에서 곧 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처럼 나타납니다(행9:25-26).

그러나 갈라디아서에는 더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암살의 위협을 느끼고 탈출합니다(행9:25).

그 후 아라비아로 갑니다.

 *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7)


바울은 왜 아라비아로 갔을까요?

아니 하나님은 바울을 왜 아라비아로 불렀을까요?

아라비아라면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 갔을까요?


여기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추측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이 먼저 사도된 자들이나 어느 누구로부터 배우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갈1:12).

오히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언제, 어디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즉 온전한 복음을 듣고 알았을까요?

다메섹 도상에서 사흘 간의 기간일까요?

바울이 뭐가뭔지 주저했던 것을 보면 그리 합리적인 주장은 아닌것 같습니다. 

 *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22:16)


바울이 아라비아로 간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추론이지만 바울이 아라비아라는 단어를 또 한 번 언급했습니다. 

바로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 이야기를 하면서입니다(갈4:25).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라비아로 갔을까요?

아니면 복음을 듣기 위해 갔을까요?


1. 시내산의 모세


보지도 못한 것을 기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어찌보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창조의 장엄함과 정확한 묘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전해 내려오는 구전을 모아서 적은 것일까요?


아라비아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 모세가 비로소 알게 된 계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약 1년 간의 시내산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창조와 이전의 긴 역사를 정리하는 기회였습니다. 

특별히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 많은 계시들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모세는 메시아를 통해 이방인들이 돌아오고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즐거워함을 보았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 기록한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신32:43)

 *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롬15:10)


2. 시내산의 엘리야


불의 사자 엘리야 역시 수많은 영적전투를 치루었습니다.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 제사장들과 싸웠습니다. 

그 후 이세벨의 살해 위협으로 탈진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엘리야를 인도한 곳은 아라비아 시내산입니다. 

이스라엘 최남단 브엘세바에서 40일을 밤낮으로 걸어서 도착한 곳입니다.

 *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19:8)


엘리야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습니다. 

세 명의 사람들을 세우고 그의 사역은 끝이 난다는 것도 듣습니다(왕상19:15-16).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데 왜 하필 시내산어야만 했을까요? 


시내산으로 부를 때 하나님의 깊은 계시를 받는 것 같습니다. 

모세, 엘리야, 바울처럼 말입니다. 


갑자기 시내산으로 가고 싶기도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바울이 섰던 그 자리에서 과거 그들과 말씀했던 숨결을 느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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