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성령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성령론 특징

오은환 2021. 1. 12. 08:12

2.1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성령론의 이해

예언사역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임으로 먼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성령론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변종길 교수의 <우리안에 계신 성령>이란 책을 위주로

개혁주의의 본산인 화란 개혁교단 내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성령론을 비판한 것을 참고로

다루고자 한다

2.1.1 아브라함 카이퍼 성령론

 


학자들 사이에는 오순절 사건과 같은 것이 한 번만 있었던 것인지,여러번 있었는데 누가가

대표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것만 집중적으로 다루었는지 대하여 여러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1888년 「성령의 역사」(The work of the Holy spirit)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단회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쏟아 부으심”(uitsorting)을 강조하면서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단번에 다 부은바 되었고 이미 오셨다(kwam)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다.

카이퍼는 “교회가 성령강림의 반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오순절에 드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오순절 이후에도 내린 성령의 강림사건, 예컨대 사마리아 교회에 오심(행8:14-15), 고넬료의

집에 내려오심(행10:44-48)을 설명하기 위해 저수지와 수도관의 비유를 들었다.

성령이 하늘의 소나기같이 단번에 내릴 때에 저수지에 받아 두었다가 각 가정에 수도관을 통해

흡족히 공급됨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카이퍼는 사마리아와 고넬료의 집에 내린 성령은 마치 옛 도시에 있는 기존 수도 시설을

이용하여 신흥 도시에 연결시켜 나오는유출(uitvloeisel)’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에 대해 변종일 교수는 "카이퍼의 성령론은 대개 '저수지설' 또는 '상수도 이론'이라고

불리는데, 주석적인 설명은 거의 없이, 그저 성경 한 구절을 읽어 놓고는 자기 나름대로 사색의

나래를 펼쳐 간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성경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여러 가지 그럴 듯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끝내버린다. 그러고는 이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자화자찬 한다”라고 비판했다.

차영배 교수도 논증의 근거와 설명원리를 하나님 말씀에 두지 않고 예증에 두었음을 지적하며

“신학적 원리가 잘못되었다”라고 비판한다.

카이퍼의 이러한 성령론은 그의 수많은 책들 중에 나오는 한 부분에 불과하며,

화란개혁교회에서 공적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다. 화란개혁교회가 성령론을 특별히

체계화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총회에서 그의 성령론을 받아들인 적도 없다.

 

화란 개혁교회는 카이퍼의 성령론을 공식 교리로 채택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외에

특별히 체계화된 성령론도 없다. 이러한 카이퍼의 이론으로 본다면 과거 오순절 강림하신 그날

큰 저수지(구체적으로 저수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름)에 보관되어 있던 성령을 시대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오순절이후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는 과거에 이미 오신 성령의 일부분의 ‘유출’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지 성령님의 현재적 임재의 역사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카이퍼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특별한 역사라고 하고, 오늘날에 일어나는 것은 보통역사라고 구별한다.

 

성령이 위에서 성부와 성자에 의하여 새롭게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신 성령이 계속 교회

내에 내재하면서 유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성령이 유출된다는 말이 없으며,

유출은 유출과정에서 변질되는 것이 그 특징인데 성경 어디에도 성령이 변질된다는 말은 없다.

카이퍼의 주장은 오순절 성령과 금일의 성령이 다르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는 “성령은 하나이다”(엡4:4)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영한교수는 카이퍼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 주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구속의 유일한

역사적 사건(eventurm historicurm unicum remisionis)으로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단일회성'(once for all)이 갖는 대표의 원리와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의 유일한 구속사건은 법적이고 객관적인 법적인 대표의 원리가 오순절 사건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구속의 사건은 단일회적이나 성령의 역사는

영속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역사적인 오순절 사건이 다시 되풀이 될 수는 없으나 오순절에 임한

동일한 성령이 오늘날 교회에도 역사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고 설명했다.


차영배교수도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을 사도들이 우리들을 대신하여 받음으로써, 우리나

그날에 회개한  3000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카이퍼가 오순절 때 성령이 다 부은바 되었다(uitsorting)고 강조하지만, 오순절 성령이 소낙비

같이 쏟아져도 온 교회를 충만케 하실 능력은 충분히 있다.

요한계시록에 성령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는 일곱영(계5:6)이라 하였는데 “일곱영”은이라 함은

충만한 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늘 보좌앞에 정주(定住) 하시는 동시에 지금도 온 땅에 보내심을 받는

분이라는 설명이다. 결국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같은 역사는 단회적이지만 영속성을

부인하면 단회성 자체도 무너지고 오순절 성령의 약속인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말씀에 어긋나게 된다.

 

오순절 사건은 ‘성령사역의 시작을 여는 중대하고 특별한 사건이였다’고 보여진다.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 날 역사하셨던 동일한 성령이 직접적으로 각

교회에서 역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사건은 단회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영속적으로 동질의 성령이 강림하신다.

그 역사하심은 성경의 계시를 벗어난 역사하심이 아니라 ‘성경의 계시안에서’라고 하겠다.

 

- 개인적인 평가 -

아브라함 카이퍼의 성령론은 분명 문제가 있지만 다른 어떤 신학자들보다 뛰어남도 많이

있습니다.

그는 성령론 연구에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유아의 중생에 관한 연구도 조금 불완전하지만 성경에 가장 가깝습니다.

성령론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없이는 성경 전체 연구는 미흡할 수 밖에 없습니다. 

2.1.2 헤르만 바빙크의 성령론

 


"헤르만 바빙크는 아브라함 카이퍼처럼 사변적으로 성령론을 전개하지도 않았으며,

오늘날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전문적으로 성령론을 다룬 것도 아니다.

그는 그의 전체 교의학 체계 안에서 성령에 대해 조금 언급하고 있을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앞의 바빙크의 설명 중에서, 구약시대의 성령의 활동을 마치 그리스도의 현현처럼

간헐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본 것은 성령의 '외적 사역'에 속한다.

(변종일 교수의 관점)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성령의 '내적 사역'이 있었고 어떤 형태로든

'성령의 내주'가 있었다고 본다면, 바빙크의 이러한 비유는 타당성을 잃고 만다.

 

물론 바빙크는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이긴 하지만, 그 당시는 아직 성령의 사역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성령의 '외적 사역'과 '내적 사역'에 대한

분명한 구별이 부족했으며, 구약시대의 성령의 활동에 대해 아직 깊은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 그(바빙크)가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소수의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고 한 것은 성령의 외적 사역을 본 것이다. (중략)...그렇다면 앞에 나온 바빙크의

구별은 비록 개혁교회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견해라고 할지라도, 그 타당성을

잃고 만다."

위 내용에 따르면, 헤르만 바빙크는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이지만 성령론을 전문적으로 다룬

적이 없다. 그는 구약시대의 성령의 활동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약에서의 성령의 활동에 대한 견해는 개혁교회 목사들과 성도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으나

그것은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2.1.3 헤르만 리델보스

- 출처 : 정성구 교수의 신학특강 -


"우리나라에서 헤르만 리덜보스는 대개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표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리델보스는 이러한 명성을 얻기에 합당한 요소가 많다."


"화란 내에서는 헤르만 리델보스가 성경 본문에 대해서 종종 왜곡된 해석을 하고 있다는

평을 듣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보다 '그리스도의 몸'이 먼저 온다는데 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합되면, '자동적으로'-물론 리덜보스가 이런 말을 하지는 않지만-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보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임을

당하는 것인데, 그는 이와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결국 리델보스의 견해를 따르게 되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회개하고 믿을 때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참여하게 되는 역사, 곧 신약성경이 말하는 '역동적인

성령의 역사'가 거의 무시되고 만다. 왜냐하면 리델보스에 의하면, 성령을 받는 것은 교회에

가입하면 자연히 참여케 되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2.1.4 (화란) 개혁교회의 상황

"그러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개혁교회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교인증가의 대부분은 유아세례를 통해 이루어졌다.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하여 믿게

하는 경우는 1990년 전후 기준으로 1%도 안 된다. "
"...유아세례를 받으면 자연히 성령에 참여하게 된다는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헤르만 리덜보스가 갑자기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카이퍼의 사상의 중심주제는

'중생'이라고 할수 있는데, 유아에게 세례를 줄수 있는 근거는 그 유아에게 '중생의 씨'가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씨'란 말은 화란어로 '자트'(zaad)인데, 이것이 카이퍼의 신학에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카이퍼의 주장에 의하면, 유아 세례받은 아이에게는 중생의 씨가 이미 들어 있음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히 열매를 맺게 되므로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런 카이퍼의

중생전제설과 성령론에 의해 목회를 하다보니 실제로 문제가 많이 생기에 되었다.

 

청소년들에게 "예수를 믿으시오"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오" 라고 촉구할 근거가 약해지고

말았다. 중생의 씨가 들어 있으니 때가 되면 자연히 열매를 맺을 건데 뭐" 하면서 젊은이들이

교회에 잘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상당히 ‘정체적’(static)이며, 교회에 가입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사실상 로마 카톨릭의 성령론과 유사하다고 할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내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나름대로 대변한다고 자부하는 장로교 고신교단

신학자의 눈으로 본 (소개한) 화란 개혁주의 신학의 성령론의 단편을 살펴 보았다.

그런데 위와 같은 주장들은 또 다른 유형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인 클라스 스킬더, 차영배 박사

등에 의해 비판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개혁신학의 성령론의 방향은 생동적 사역을 향하여 열려야 한다.

생동적 성령사역을 수용하면서 체험보다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는 개혁 신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성령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과 병행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개혁신학은 성령의 역사의 다양성, 개인의 마음에 중생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사역만이 아니라

창조의 보존, 이성과 양심, 중생과 성화, 교회와 선교, 문화와 역사에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연구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또한 성령의 은사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론을 더 중요하게 다루어 어 균형을 이루고 있다.

 

<펌글> - 국제 이웃 선교회

 

참고 - 우리 안에 계신 성령(변종길 교수)

목차

머리말 ... 4
1 성령의 인격 ... 9
2 성령의 내주와 충만 ... 30
3 셩령의 은사 ... 62
4 성령의 열매 ... 106
5 성령의 인도 ... 138
6 진리의 영 ... 158
7 성령 세례와 중생 ... 186
8 성령의 사역과 구속사의 진전 ... 242
9 칼빈의 성령론 ... 270
10 개혁교회와 성령론 ... 301
참고문헌 ... 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