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복음서

천국을 침노하는 자

오은환 2021. 3. 14. 14:01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옛 시대의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마다 조심조심하며 분별하려 애씁니다.

"행위 구원인가? 은혜 구원인가?"

 

복음서를 읽다보면 바울서신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둘 사이에서 혼돈은 지금까지 계속됩니다.

천국은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냐, 혹은 행위로 들어가느냐로 고민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마11:12)"

 

 

1. 언제부터 천국사역이 왕성하게 시작되었는가?

'침노'라는 단어에 집착하다보면 나머지 것들을 보지 못합니다.

먼저 하나씩 정리해보면 편하게 본질에 도달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는 시간이 전제됩니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부터 예수님의 사역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두 사람은 무슨 사역을 하였기에 천국과 관련된 것일까요?

두 사람이 전한 메시지의 시작과 핵심이 모두 동일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4:17)

 

천국이 가까이 이르렀으니 회개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천국에 입성하는 기준에 비추어 함량미달이 되는 부분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천국 기준으로 요구되는 것에 도달하지 못한 자들은 돌이켜야 합니다.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2. 침노라는 단어와 연관된 회개

천국의 문은 회개라는 열쇠를 통해 열립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요단강가에서 외쳤습니다.

그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할 때 즉시 세례를 주기 위함입니다.

바로 죄 사함을 위한 세례입니다.

 

천국은 회개를 통해 죄 사함을 받으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죄 사함은 마음의 고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연결되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 결과 세리와 창녀들 또 힘으로 억압했던 군인들과 모든 사람들이 회개에 동참합니다.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채찍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세례 요한이 바로 오리라 약속한 엘리아였고, 예수님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서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또 능력을 행함으로 어느 누구도 거부하기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3. 가까이 왔다 VS 이루어졌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항상 동일합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에도 <가까이 왔다>는 것을 잊지 않게 깨웁니다.

곧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사람들을 염려했고,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눅19:11)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나타날 때는 아직 멀었다고 알려줍니다.

이방인들이 돌아오고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눅19:12)

 

그러면 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을까요?

초림의 메시아의 도래가 있어야만 그 후에 재림 때 심판자로 오시는 왕이 직접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가시적인 도래가 이 땅에서 펼쳐지기에 그렇습니다. 

이 시간은 우리들에게는 길게 느껴지지만 성경은 초림과 재림으로 인한 심판을 마치 한 순간처럼

묘사합니다(마3:2,12, 행2:16-21).

 

4. 복음서를 읽을 때 전제되어야 할 두 가지 요소 - 매우 중요함

1-3번까지 읽다보면 유대인들의 구원은 이방인들과 다른가 하는 의문이 발생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 이방인들은 무조건 예수만 믿으면 된단 말인가하는
의혹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정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구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알아야만 복음서를 바르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근거해서 세워진 국가이자 교회입니다.

교회가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 깨끗하게 되어야 하고, 그 결과 성령이 내주해야만 성도가 되어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면서

그 후손들도 그런 믿음을 가졌음을 인정하셨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아무 공로가 없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에 근거해서 태속에서부터

의롭다 함을 주신 것처럼, 그것을 인정했다는 표징이 바로 할례라는 성례입니다.

부모의 믿음을 따라 자녀를 의롭게 하는 은혜의 언약의 바로 할례입니다(롬4:11).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과 복음서를 읽을 때 구약 교회 성도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근거해서

<이미> 깨끗게 되었고, 또 성령이 내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전제를 알고 구약과 복음서를 읽어야만 바른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타난 회개는 이미 구속함을 받았고, 성령이 내주하여 거듭난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행위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이미 주어졌는데, 구약 성도들이 복음과 무관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상태에 머무를 때,
회개를 통해 다시 회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듣지 않는다면 그들이 과거에 무엇을

했고, 어떤 유익을 받았든지 다 무효가 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관심을 가졌던 대상이 누구입니까?

말을 잘 듣고 우리(울타리) 안에 거하는 양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잃어 버린 양들 곧 죄인들입니다.

잃은 양이란 용어는 이미 과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지금은 아닌 상태입니다. 

그대로 놔두면 다 늑대와 곰과 사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무리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통해서 구원이 무엇이며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지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