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을 통해 성도의 정체성과 거듭남 그리고 성령의 내주와 조명을
보면 구약성경도 잘 보입니다)
아주 두꺼운 성경책은 어떤 주제를 많이 다루었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성도의 정체성’이라 보여 집니다.
너희는 누구냐? 성경은 반복해서 정체성을 알려주고 성도들을 깨워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성도들을 책망하는 것도 정체성을 벗어났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청중들을 깨운 것도 정체성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바울 사도는 역시 서신서를 통해 정체성을 알려주고 그렇게 살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칭찬도 책망도 그 기준은 정체성을 설정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가 쓴 서신에서 매우 중요한 정체성을 부각시킵니다.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의 성도들 또한 모두 동일한 정체성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은 바로 성령이 내주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우리는 소중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성도들과 불신자들의 차이입니다.
성도들 안에는 성령이 내주해 있고, 불신자들 안에는 성령이 내주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내주한 성도들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선악을 분별할 수 있으며,
또 성령의 힘주심을 따라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또 모든 역경에서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환경을 넘어선 즐거움을 누립니다.
만약에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데 선을 행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에 대한
책망과 함께 형벌이 따라옵니다.
구약 시대에 자주 말씀하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에 대한 사랑을 외면하면 선지자들을 통해
크게 책망을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이 내주하는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 매우 중요한 단어가 발견됩니다.
“우리 속에 거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씀>을...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내주하며 시기한다는 구절이 바로 신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나온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구약에서 인용했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성경을 기록하면서 구약을 인용할 때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록된 바”(마2:2:5), 기록되었으되(마4:4), 혹은 “말씀을 이루려”(마1:22),
말씀하신 바(마2:17), 하나님이 이르시되, 등이 사용됩니다.
야고보는 흩어진 유대 성도들을 향해 책망합니다.
그들의 신앙의 행동들이 불신자들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자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바로 잡아 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당신들은 구약성경에서 말씀하신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 안에 성령이 내주하며, 우리가 그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 시기, 질투하는 것을
잊으셨습니까?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십계명을 회상시키는 것 같습니다.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고,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출20:5)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는 질투한다, 시기한다고 표현합니다.
출애굽기 29:45절도 그렇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런데 야고보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도 동일하게 이 말씀을 구약에서 인용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성령의 사람인지 조차 망각하고 살아가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그들의 정체성을 찾도록
일깨워 주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주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6:16)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혹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되는 곧 구약성경을 인용한다는
표현입니다.
바울의 독창적인 말이 아니라 구약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야고보서 4:5절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동일한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기 소견대로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사사시대가 마치 중세시대처럼 제 멋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 마지막에는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성도들이 성령 안에 거한다는 정체성은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자유자재로 사용합니다.
어느 곳에서는 두 곳을 모두 사용하기도 하고, 한 문장만 사용하기도 합니다.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란 표현은 곧 성령을 보내신 성부 혹은 성자 예수님 안에
성도들이 거한다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성도들로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삼위 하나님 이것이 바로 성전 됨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거룩했고,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계속해서 거룩함을 좇아야 합니다.
*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너무너무 중요하고 암송하는 구절입니다.
거룩함이란 단어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킵니다.
역사적으로 정체성이 강하며 뚜렷한 민족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비록 힘이 없고, 인구가 별로 안 되더라도 이스라엘처럼 생존력이 강해서 살아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개인들도 정체성을 강할 때 신앙에서 떠나지 않으며, 온갖 역경에서도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성령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거룩함을 일깨워주고,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줍니다.
또한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서 죄에서 구별되게 하고, 생각을 깨끗하게 하며, 희생을 하더라도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게 만듭니다. 때로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지거나 낙심할 때도 이런 정체성을
기억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성령이 거하는 거룩한 성전 됨은 신약시대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이미 구약성도들도 이런 특권을 누렸고 또한 의무도 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구약 성도들처럼 힘들어하는 이웃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성령 안에서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5절이나 신명기 30:6절을 통해 성령께서 사랑을 제공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배에 함께 승선하고 있는 선원들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승선생활 자체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사회와 분리된 채 사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과중한 업무와 책임이 힘겹습니다.
그런데 이웃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얼마나 무겁게 느껴집니까?
한 마디로 버거운 집니다.
그런데 승선생활의 행복이 이웃을 향한 사랑을 나눔에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내게서 나온 사랑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사랑입니다.
매우 자연스러운 사랑입니다.
고독한 지체들을 품어주고, 가족들로 인한 아픔을 위로해주며, 병든 몸으로 인한 고통을
품어주는 것이 우리가 승선한 이유가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성령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증거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능력이 존재합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조상들이 성령과 함께 살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을 엄히 책망한 것입니다.
*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
구약 성도들이 성령을 거스리며 성령의 음성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들에게 말씀을 조명하여, 희생하며 나누라고 하는데 아까워서
못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노예로 끌려간 요셉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39:2)
함께 하셨다는 표현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은 어떻게 성도들과 함께 했겠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이 보낸 성령이 성도들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변함이 없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았던 요셉은 죄의 유혹을 분별하여 멀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인의 유혹을 이렇게 이겨냈습니다.
*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
사랑하는 선원 가족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사실을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또한 성령 안에서 하늘의 귀한 은사들과 보화들을 받아 누린다는 것도 늘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이 놀라운 정체성을 지닌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또한 절제된
삶을 살아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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