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완성시킨 칼빈의 삶은 무척 바빴습니다. 무엇보다도 천주교와의 논쟁과 개혁교회 신학의 정립과 목회자들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일은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몸에는 수많은 질병을 짊어지고 연구에 매진한 것만도 엄청난 무게였습니다. 박윤선 박사 역시 그렇습니다. 한국교회 초석을 다지기에는 그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한국어로 된 신학서적이 전무한 상태에서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을 위한 주석이 필요했고, 그 일을 위해 7개 국어를 했으며, 그 중 5개 국어에 능통했습니다. (영어, 히브리어, 헬라어, 독일어, 화란어) 이외에도 일본어와 중국어까지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아쉽게도 칼빈의 요한계시록 강해는 속기사의 죽음으로 세상에 알려지..